“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바람이었어” 어느 여가수의 노래처럼 ‘만남’이라는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만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예측도 못했던 기대도 못했었는데 어느 날 한 만남이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어떤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만남’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으면 여학생들은 그 귀여운 입을 오물거리며 “미팅”(meet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인카운터”(encounter)가 정답이다. 이것은 대결이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왜 만남이 대결인가? 만남이란 실은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너를 너 아닌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나와 너와의 불꽃 튀는 싸움으로 시작되어 드디어는 너는 내 안에서 살고 나는 네 안에서 사는 삶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결과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미팅’과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아니면 너와 내가 새로운 하나가 되느냐의 결단을 요하는 ‘인카운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진정한 만남은 후자이고 따라서 만남 뒤의 두 개체는 만남 전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믿음도 그렇다. ‘믿음은 만남이다’라는 말이 이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또 무엇인가. 성경에는 이렇게 정의 되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는 믿음을 통해 바라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면서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믿음은 사람들 사이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과학적 인식 방법과는 순서가 정반대다. 과학에서는 먼저 올바른 인식을 하고 그 다음에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거꾸로 믿음이 올바른 인식의 대전제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적인 인식 방법은 논증적이고 분석적인데 비해 믿음은 정반대로 직관적이고 종합적이다. 논증적, 분석적이란 객관적인 사실을 대면서 이치대로 따진다는 뜻이고 직관적, 종합적이란 감과 체험으로 안다는 뜻이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생모라고 믿는다. 이것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분석을 하거나, 논증해보고 검증을 해 본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또 자신이 태어난 후 누구와 바꿔치기 당하지 않았는지도 조사한 적도 없고 호적을 뒤져 본적도 없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검증이나 분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만남은 우리에게 믿음을 안겨준다. 만남이란 이렇게 귀한 것이다.

이런 귀한 만남을 여섯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첫째는 일회성(一回性)이다. 이것은 단 한 번으로 족하며 그 한번으로 끝내 준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그렇다. 한 번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평생 이어진다는 뜻이다. 둘째는 운명성(運命性)이다. 이는 그 만남으로 인해 삶이 정해지고 그런 삶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우연성(偶然性)이다. 만남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자기 노력으로 따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날 그것이 자기의 뜻하고는 달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넷째는 전환성(轉換性)이다. 이는 그 만남으로 해서 삶의 방향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메타노이아’라고 하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회개’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스 원문은 ‘방향이 새로워진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다섯째는 창조성(創造性)이다. 이는 만남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총각과 처녀가 만나 남편, 아내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을 낳고 길러 새 차원의 삶이 열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만히 그려보자. 이것이 바로 창조인 것이다.

마지막 여섯째는 인격성(人格性)이다. 만남은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만 이루어지고 그러기에 두 생명체가 불꽃을 튀기면서 서로 인격적인 주체로 믿는 곳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몇 년 전 ‘닉 부이치치’ 신드롬이 지구촌에 희망의 불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는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장애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둠 속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아주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본 그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비록 머리와 몸통 밖에 없는 그였지만 그는 어떤 정상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밝게, 더 기쁘게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처음부터 그런 마음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로부터 ‘외계인’ ‘괴물’ 이라고 놀림을 받을 때나 힘들고 지쳐죽고 싶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니겠지만 그 역시 팔 다리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고통이야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를 이렇게 만드신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며 언젠가는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며 아들을 위로 해주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너는 정상적인 아이들과 놀아야해. 너는 단지 몇 가지 사소한 신체 조직이 없을 분이다.’ 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칭찬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도 있지만 ‘닉 부이치치’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삶을 바꿔 놓은 것은 어머니의 칭찬과 사랑과 격려에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만나면서 닉 부이치치는 장애의 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희망의 전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이 좋은 만남의 관계를 갖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믿고자 했던 것을 무조건 믿으려고 하면서도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아주 못 된 습성을 갖고 있다.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역시 그렇다. 자신의 잣대에서 평가하다보니 오해도 생기고 분쟁도 생기며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고 자칫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 순간의 만남과 믿음이 한 사람의 삶의 역사를 바꿔 놓을 수 있다.

네거티브로 일관하는 대선 후보들을 보면서 그들의 만남을 어떤 만남으로 평가를 해야 할지 아리송하다. 대다수 국민은 미래를 걱정하고 희망을 기다리는데, 대통령이 되면 어떤 정책으로 국민을 편하게 할 것인가라는 말은 없고 지난 과거만 따지고 상대의 흠집내기에만 열을 올리니 국민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믿음이 없는 만남, 그래서 잘못된 만남의 관계로 유권자인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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