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드 보봐르’의 말이다. 이는 여자는 인습의 틀에 매여서 여성화되어 진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처럼 남성에게도 전통적으로 잘못 학습되어 진 신화가 있다. 우선 첫째, ‘남성은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세뇌되어 온 말이다. 두 번째,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남성들은 모든 종류의 정서적 표현을 스스로 억압해왔다. 그래서 남자들의 경우 어떤 슬픔에 빠져도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속으로 병들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발뺌을 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심각한 죄가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의 성서로 알려진 탈무드에 보면 “사람 앞에서 웃어라.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많이 울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대는 진정한 웃음과 순수한 눈물이 사라져 가고 있다. 메마른 눈물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메말라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예수님께서도 동시대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너희가 울지 아니했도다.”(눅 7: 32) 라고 말이다.

사람의 첫 번째 언어는 ‘울음’이다. 그 다음에 배우는 것이 웃음이고 그 다음이 언어다.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눈물로 인생의 삶을 신고한다. 울지 않는 아이의 경우 간호사에게 엉덩이를 얻어 맞아 가며 울음을 터뜨리며 살아있는 생명임을 모두에게 확인 받는다.

아이들은 느끼는 대로 반응하고 표출한다. 아프면 울고 좋으면 웃는다. 속으로 참는 법 없이 그대로의 감정을 나타낸다. 체면도 모르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안으로 쌓아두는 감정의 응어리가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사람들은 감정의 옷을 입기 시작한다. 나중에 감정의 훈련을 지속적으로 너무나 잘 받은 나머지 우는 일도 힘들어진다.

감정을 방류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을 이기기 위해서는 감정의 무장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눈물이 날 때 눈물을 흘려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굳어진 감정의 감옥에서 탈옥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 마음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면 마음의 병에 대해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눈물샘에서 나오는 눈물은 98.5%가 물이다. 나머지는 염분, 칼륨, 알부민, 글로불린 등의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눈물이 짭짤한 이유는 눈물 속에 있는 나트륨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체액은 3가지다. 땀과 눈물과 피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따뜻한 체온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요한복음 11장 35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말 성경은 3개의 단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은 그 보다 더 짧다. “Jesus Wept” 딱 두 단어로 이뤄져 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에 ‘눈물’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작가 ‘괴테’가 “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는데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고난의 인생에 대한 노래 또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류머티스에도 눈물 치료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일본 의대의 명예교수인 ‘요시노신이치’의 임상실험 발표가 있기도 했다. 우리가 가진 감정의 바다에서 웃음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해일과 같다. 눈물을 통해 우리는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그 눈물의 역할과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할 때도 많은 여인들은 예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했지만 남자들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감정이 없어서 일까. 눈물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본능에 비추어 속으로 울고 있었을 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울고 싶을 때는 우는 것이다.

며칠 전 40대 목사의 사모가 소천했다. 그 사별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문상객들을 맞이하면서도 울음을 참으며 초연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흐르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참는 것이다. 남성은 강해야 한다는 말에 쇠뇌 되어 왔기 때문에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미5:4)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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