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熅 不亦君子乎)’ 라는 글이 있다.

이를 두고 다산은 배우고 익힌다는 ‘학이시습’을 학은 지(知)이고 습은 행(行)으로 해석해 지행겸진(知行兼進)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완성됨을 뜻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벗이 멀리서 찾아옴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음을 타인들이 완성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또 자기를 완성하여 남들이 알아주고 찾아옴이야 즐겁기 그지없겠지만 나를 알아주지 못하며 나를 높이 여겨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음은 남을 완성시키는 일이 남의 권한에 속한 것이지 자신이 남을 완성하게 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아량을 지닌 사람이 바로 군자(君子)라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남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저버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알리기기에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요즘 세상인데 어찌 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낼 수 있겠는가.

세상사가 어찌 자신의 뜻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겠는가. 그러나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이룰 수 있다. 낮은 목표를 이루고도 크게 만족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뜻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를 두고 현명한 사람이라 할까? 그것은 모든 것에서 무엇인가 배우는 자를 말한다. 어떠한 자를 굳센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를 억제하는 자를 말함이다. 어떠한 자를 부유한 사람이라 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몫에 만족하는 자를 말함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모임에서 돌아오며 허탈해진 마음에서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스스로의 몫’에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낸다면 다산이 말하는 군자가 될 수 없다. 비록 군자가 될 수는 없어도 남을 완성할 권한이 없는 내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억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늘 배우면서 자신을 깨우치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소인배나 하는 짓이다.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면 된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날 모임에서 힘들고, 실망하고, 배신감마저 느끼며 서운한 마음이었지만 그 순간은 뼈를 깎는 것 같은 아픔이며 슬픔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지나고 나면 그것마저도 가끔은 그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라는 넓은 마음이 되어 스스로를 달래본다. 그리고 남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이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있을지라도 결코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속인다 해도 극복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또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단지 늦었을 뿐이다.

남의 가슴에 들어 박혀있는 큰 아픔보다 내 손끝에 작은 가시의 찔림이 더 아픈 것이기에 다른 이의 아픔의 크기를 가름 하긴 어렵겠지만 더 이상 나만의 생각과 판단에서 스스로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라도 아픔 없이 살아온 삶이 없듯이 시간 속에 무디어지지 않는 아픔도 없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아픔과 슬픔마저도 지나치면 그리울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의 힘겨움, 또 어디선가 그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주저앉고 싶었고, 또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내 곁을 스쳐지나갔지만 지금도 난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와 다르다고 탓하지 말자. 세상이 이기적인 세상인데 어찌 하겠는가. 누구든 욕심은 있어 소유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것을 초월하면 그것이 바로 군자의 자세다. 잃을 것도 없고 영원히 소유 할 것도 없다. 내 입장에서 남이 나를 배려 해줘야 한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지워야 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남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세상이지만 우리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말자. 울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가슴을 파고드는 현실의 비수라도 우리 삶 어디쯤엔가 무디게 닮아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우주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청소를 하는 미국 나사(NASA)의 청소부처럼 비록 하잖아 보이는 허드렛일이라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살면 된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믿고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하지 말자. 그리고 바람에 몸을 맡긴 겨울나무 가지처럼 처연한 삶을 살자.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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