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종교적 갈등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용서’ 가 국내 극장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분쟁으로 테러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가자지구의 사람들 중 크리스천인으로 개종한 100여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 되었는데 이들은 개종한 이유 하나 때문에 은밀히 예배를 드려야했고 생계 수단과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포기해야만 했던 신앙 간증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는 것이다.

한 때 팔레스타인 저격수로 있던 선교사 ‘타스 사다’는 가족에까지 죽임을 당할 뻔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슬람교를 배반하면 반드시 처단한다’는 법률이 제정 되어있어 기독교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은 한결 같이 인터뷰를 통해 “동족들이 종교핍박과 더불어 이스라엘 내에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에 따르고 있다” 면서도 “그러나 우리를 핍박했던 이스라엘 군인과 무슬림을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께서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을 전 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고 심지어는 핍박까지 했던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한 것이다.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던 지역의 문제를 담고 서로를 용서하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는 명쾌한 답이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안 것이다.

용서와 관련한 영화가 또 하나 있다. 전도연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밀양’이다. 아들을 죽인 사형수를 용서해주라는 권고를 주위로부터 많이 듣는다. 결국 그 같은 권고에 일단 마음을 정리하고 사형수를 면회했는데 예상외로 사형수가 너무 명랑하고 밝은 표정에 대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형수가 하는 말이 주님께 죄를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았기에 지금은 이렇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생활 할 수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은 여주인공은 미움과 용서라는 관계에서 갈등을 느낀다. 그리고 분노한다. “내 아들을 죽인 저 사람을 용서하라구요? 이해하라구요? 남의 일이라고 그리 쉽게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피해자인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가책도 보이지 않고 정작 내게는 한 마디 용서해달라는 말도 없는 건가요?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용서했단 말인가요?” 하며 오열한다. 어쩔 수 없이 용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나 실화는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내 아픔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용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보면 더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조건 없는 용서를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작은 일에 대해서도 용서를 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사는 자신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할 때도 많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내게 안겨준 사람에게 마구 퍼부은 말들과 복수, 그러나 모든 것들이 뒤돌아보면 후련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아픔의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차라리 훌훌 털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무거움과 후회가 남게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힘들긴 하겠지만 그 용서야말로 사사로운 나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먼저 사과하고 먼저 용서를 구하면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도 작은 자존심, 고집 때문에 더 큰 화근을 만들기도 하고 미움을 갖게 되면서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두 영화를 두고 느끼는 것은 용서에는 감정의 다스림 못지 않게 배움의 자세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용서란 타인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요즘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는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유는 용서라는 행위는 생각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화해와도 다르고 또한 무조건 참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상처받은 감정의 찌꺼기를 덮어버리게 되면 그 상처는 분노의 뇌관이 되어 마음속에 잠재된 채 폭발할 날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분노의 뇌관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용서는 또한 상대방의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주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의 반응 여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자기의지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처럼 자신을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고 또 죄인으로 감옥에 갖쳤던 수모등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이 이런 일을 예상해서 먼저 보낸 것이니 두려워 말라며 형들을 용서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반드시 진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용기 있게 통과 한 후에야 비로소 용서가 주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참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회복은 물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용서에는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메디팜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