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려는 내면의 가르침이다.” 어느 스님의 법어에 나오는 글귀다.

고통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게 닥친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또 그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느끼는 아픔에 대해 우리는 고통, 불안정, 불행이란 이름을 붙여놓는다. 반대로 내 자신이 흔쾌히 받아드릴 수 있고 또 인정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기쁨, 안정, 행복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각기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는 모든 일에 우리는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기쁨이 불행으로, 불행이 다행으로도 바뀔 수 있는 세상사를 수없이 겪어보고 지켜보았음에도 불구, 우리는 우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선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이 되다보니 내가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은 다 고통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떤 일이 자신에게 닥쳐왔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 하는 것을 즉각 인지 할 수 있는 전자동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내게 오는 이익과 불이익을 가려내고 합당과 부당함을 선별해내어 얼른 또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우리가 가진 인식체계들이 하는 일이다.

어쩜 그것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가짐으로써 오는 기쁨과 잃음으로 인해서 오는 슬픔 등으로 구성 되어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첫 번째인 고(苦)는 8가지의 대표적인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생로병사로 인해 오는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망과 미움에서 못 떠나는 고통,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느끼는 고통, 생각의 발로가 맞지 않는 고통, 이러한 고통들이 쉬지 않고 우리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으니 자연스럽게도 일상생활이 모두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고(苦)에 빠져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 모습이다. 결국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우리가 집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고자하는 마음이 있으면 설계를 하게 되고 설계에 따라 공사를 한다. 그래서 없는 곳에서 있는 것으로 물질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본래 없는 곳에서 마음이 일고 그 이는 마음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바깥의 모습도 변해가니 집착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나의 일어나는 마음도 결국 허공에 이는 바람이니 이 또한 집착 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 스스로의 마음을 넓힌다면 결코 세상은 고해의 바다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바뀌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아, 이것은 내 내면의 스승이 나를 더욱 지혜롭게 만들기 위한, 그리고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그래서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내면의 가르침이구나 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질을 탐하며 소유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잃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그리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슬프고 괴로운 일은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내면의 가르침이니 내가 그 근본에서 결국은 나를 지혜롭게 이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면 내 인생은 정말로 달라질 수 있고 참 기쁨으로 살 수 있다.

누군가 내게 왜 돈도 되지 않는 글을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삶이 고통스럽고, 그래서 살아있고 싶은 몸부림으로 글을 쓴다고.” 삶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고민할 것이 없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글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주는 영감이 있다. 따라서 고통은 축복이다.

그동안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칼럼을 올리며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 건 아닌지 염려가 된다. 많은 사람들의 격려도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의 경우 왜 목사가 불교적인 글을 쓰느냐고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편견의 시각으로 보는 그들의 사고가 나를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화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글은 어디까지나 글이다. 그리고 그 글은 학문이다. 그래서 그 글을 학문의 일부인 글로만 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글과 종교를 연관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에 대해 지나친 선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단지 글을 쓸 때는 동양철학적 차원에서 글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설교를 할 때라도 필요에 따라 성도들에게 불교에 대한 말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지금 내 앞에 닥친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하나의 재료에 지나지 않으므로 자기 근본에 대한 믿음으로 내려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나를 발전시키고 많은 이들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최근에 9번째 시집을 펴냈다. 그 역시 고통의 산물이다. 종교인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삶에 지쳐버린 고통에 덩어리들을 세상에 내뱉은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내 시집 한 권을 다 읽으면서 밤새 울었다고 한다. 그 분의 경우도 시를 읽으면서 우는 이유도 결국 그 속에 자신의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서려있는 까닭에 더 슬퍼지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오래 전 특별집회에 초청을 받아 했던 설교제목이 생각난다. ‘할 말이 없는 인생은 살지 말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쁜 상황은 없다. 다만 그 나쁜 상황 속에서도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가치 있는 열매를 얼마든지 맺을 수 있다. 어떤 고통이 다가와도 할 말을 하고 사는 인생이 되어 항상 밝아있음을 그대로 믿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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