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마다 친분이 있는 몇몇 목사님들하고 산행을 한다. 산행을 한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고행이다. 그러나 그 고행을 스스로 자처하고 대자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좋은 만남을 생각하면 그 고행의 시간은 즐거움의 시간이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고통마저도 행복해지게 되는 것이다.

관악산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등산화를 신은 스님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사찰이 산 위에 있다 보니 아예 등산화로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평지를 걷듯 가볍게 산을 오르고 있다.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 문득 ‘안거’(安居)가 떠오른다.

전국의 선원(禪院)과 선방(禪房)이 있는 각 사찰의 경우 매년 2회에 걸쳐 안거를 실시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도 ‘피정’ 이라는 수련기간이 있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안거란 원래 옛 인도에서 우기인 여름철에 수행자들이 외출을 삼가하고 수행에만 몰두하던 데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의 하(夏)안거와 음력 10월 보름 다음 날부터 다음 해 정월까지 하는 동(冬)안거가 3개월에 걸쳐 시행되고 있다. 이때가 되면 전국의 스님들이 각 사찰 일주문을 들어와 안거에 들어간다.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앉아서 좌선한다는 것 자체가 범인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직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염원 하나로 모든 것을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특히 수행자로서는 자기 마음근본에 대해 깨치게 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자기 자신만의 성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밝아짐으로서 세상 모두가 더불어 밝힐 수 있는 공덕을 지니고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 같은 수행의 노력은 결국 중생(衆生) 모두를 위한 것이다. 스님들은 가행정진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일주일 이상을 잠도 자지 않고 정진을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안거에 대해 사찰 큰 스님에게 물었다. 그 스님은 “이 마음 공부 하는 데 ‘선’ 에는 안거라는 것이 특별히 없다. 왜냐하면 해제를 했다 해도 선이고 안거를 했다 해도 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안거를 했을 때는 우리가 살아있고 해제 했을 때는 우리가 죽은 게 아니잖는가 ”로 화답했다.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려웠지만 따로 공부라고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가 자기를 성장 시키는 공부인 줄 알게 된다면 먹는 일에서, 자는 일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 일체의 가르침을 받으며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일러 주신 것 같다. 즉 내가 전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조차도 집착이 되지 않도록 항상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일상이 그대로 ‘참선’이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동물) 들은 먹는 것 자체가 삶이지만 유독 인간만이 먹는 것을 삶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같다. 궁핍하게 살아가던 옛날에는 먹기 위해 살았지만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보릿고개가 사라진 지금 세상은 먹는 것은 단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생의 참된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적 발전을 가늠할 수 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더 많은 식량과 주택공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힘있고 가진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못 가진 자들의 생존권을 움켜쥐고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부(富)를 위해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치부 수단으로까지 이용되고 있다는 게 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이지만 전문 시위자들을 동원 불법행위까지 자행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이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개발지역마다 걸려있는 프랭카드의 붉은 글귀를 보면 분노에 앞서 섬뜩해지는 마음이다. 모두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데서 이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쥐들을 위해 한 술 밥을 남겨두고 불나비들이 날아와 타죽는 것이 안타까워 불을 지피지 않고 밤하늘의 별빛 아래 시를 읊던 선조들의 삶과 자금의 우리들의 삶을 비교하면서 어느 것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봄직도 하다.

대다수 세상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양식에 대해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그 허전함을 물질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욕이 되풀이되면서 풍족함보다는 갈수록 빈곤의 갈증만 더 느끼게 되는 게 인생이다.

얼굴이 두꺼워 수치를 모르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마음이 때묻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취하고 누릴지라도 이 세상을 떠날 때면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헛되고 헛됨을 알게 된다는 것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무엇인가 움켜잡으려면 할수록 달아나고 가지려하면 할 수록 점점 공허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흔히 인생을 험한 바다에 빗대어 고해(苦海)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상처 입을 대로 상처를 입어 찢기고 망가진 난파선과 같은 영혼들이 너무 많이 방황을 하는 것 같다. 또한 목적 항을 잃어버린 채 어디로 향해 나아가야 할 지 모르는 표류선과 같은 행렬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내 자신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영혼들이 울부짖는 유령선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두가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내가 전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조차도 집착이 되지 않도록 항상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일상이 바로 참선이 되는 게 아닌가. 바쁜 현대 생활에서 자신이 걸어온 숫한 날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시간은 없다. 그러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우리에게 안거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시간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 조금은 담담하게 바라봐주면서 지금은 힘들게 다가와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나는 진정코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갈 거라고 믿고 그 마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면 그 힘든 일상이 그대로 참 선이라 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하산을 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 인생도 그러하리라.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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