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런 행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내가 평생 추구한 행복의 가치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욕심은 쉽게 만족하지 않고 무한대로 끊임없이 진행된다. 인간의 기본욕구와 성장에 관해 발달심리학자 ‘메슬로’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선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육체적인 욕구다. 그래서 먹는 음식이 문제가 되고 생리적인 욕구가 문제가 된다.

육체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안전의 욕구가 있다. 인간의 본능은 배고픔이 어느 정도 채워지게 되면 고통과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런 욕구 다음에 오는 것이 소속의 욕구다. 친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친구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모임에 소속되기를 바라고 또 거기서 자신이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자기 존중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항상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욕구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가게 되어있다. 결국엔 사람의 행복이란 자기 존재를 계속 확인해나가는데 있다. 누구나 인간은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즐거움은 대부분 몇 날을 가지 못하고 또 다른 근심거리를 대면하면서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좋은 날 유쾌한 웃음으로 웃고 헤어지지만 우리의 헤어짐의 뒤안길에서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슬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과 즐거움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슬픔을 경험하고 낙담하는 날 그 슬픔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이유는 슬픔을 삼키는 유쾌한 일이 우리를 다시 위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즐거운 새 일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삶을 사는 인생인 것이다.

예수님은 유명한 산상 수훈에서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 것이고 지금 애통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위로의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슬픔과 즐거움의 역동적 순환의 진리다.

미련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세월은 순간에 불과 하다.그 짧은 시간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길 것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은 죽든 말든 즐거움을 찾아 인생을 만끽해야지. 노력을 해도 결국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끝인데... 왜 사서 고생하고 남까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추구한다. 인간다운 삶, 그것은 인간 내면 깊숙이 갖고 있는 원초적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삶과 죽음의 신비를 묻는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성서(聖書)는 지혜로운 해답을 가르쳐주고 있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산(生) 사람은 누구나 다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소중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무수한 지난날들 속에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운 삶의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운 추억거리가 된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추억, 그리움, 아름다웠던 지난날들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삶의 시간들인 것이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아픔의 시간일지라도 모두가 되돌아보면 아름답고 귀중한 시간들이다. 모두가 바라는 그 행복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지난 7일 행복 전도사를 자처하던 최 윤희 씨가 전신홍반성난창으로 고통을 겪다가 남편과 동반 자살을 해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원인이야 어디 있든 ‘행복전도사’ 마저 자신의 행복을 잘 챙기지 못하고 도중하차를 했으니 역시 행복하기란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지만 행복전도사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잘못된 것 같다. 희망의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던 많은 환우들이 입을 충격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고인의 말처럼 700가지의 고통, 당해본 사람들만 알 뿐이지만 만약 고인이 좀 더 일찍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더라도 이렇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떠나지를 않는다. 하도 증세가 천차만별이어서 ‘천 가지 얼굴의 병’으로 불리는 이 병에 걸린 방송인 정미홍 씨의 경우 낙심에 앞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환우회를 조직하고 사회적으로 이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지금은 15년간 복용하던 약도 끊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고인은 소극적인 성격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행복과는 상관없는 길을 가면서 행복이 찾아주기만을 기다린다. 정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만족’이라는 욕심을 버리고 낮은 자세에서 베풂의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된다.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항상 감사함으로 살면 그게 바로 행복이고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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