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사회’가 정치적 화두로 급부상한 느낌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6.15 경축사에서 언급할 때만해도 언론들은 통일세를 큰 제목으로 달고 공정한 사회는 작은 기사로 처리되는 등 생기 없는 정치구호에 불과했다.

공정한 사회를 사회적 화두로 키운 것은 소장수 아들이라는 서민적 이미지의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비롯, 장관 후보자 낙마와 외교부 특채 파문이 겹치면서 실체를 나타내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민들조차 초미의 관심을 갖게 되면서 거둬들일 수 없는 아젠다가 된 것이다. 왜일까. 풍요로운 삶은 과거에 비해 향상되었지만 불만이 고조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총리 후보의 경우 그가 불명예스럽게 낙마된 것은 중앙정치 경험 부족보다는 의원 보좌관을 하며 배운 겉 다르고 속 다른 여의도 정치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공정한 사회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병역기피,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인사파문 등 다양한 뉴스들이 숨가쁘게 전개되면서 서민들로서는 좀 헷갈리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고 이제까지 규칙을 지키며 살아온 삶이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사회구나 하는 것이며 권력의 힘만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구나 하는 것이다. 권력이 공정을 판단하게 되고, 그의 입맛에 따라 공정과 불공정이 결정되면서 정의라는 이름이 변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공정한 사회란 각자가 받기에 합당한 몫을 차지하게 하는 사회를 말한다. 그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몫을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억울해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인이 공정한 사회를 말하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돌아보아야 한다. 원칙과 철학을 바로 세웠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권력이 ‘벌거벗은 임금’처럼 행동하면서 국민들에게만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권력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권력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반성과 절제, 포용을 실천할 때 비로소 시민 개개인은 공정의 엄숙함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정성은 권력의 자기 반성과 자기 희생을 먼저 요구할 정도로 비장한 화두다. 구호를 외치는 자의 겉과 속이 다를 때 공정사회는 또 한번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부가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열려라. 참깨” 하면 즉각 공정사회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세월 불공정 관행과 의식에 찌든 공동체에서 공정을 외친다고 하루아침에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와 특채 논란에서 드러났듯 기성 지식인들은 리더십의 기본인 도덕성에서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다. 현 시점에서는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는 없다. 국회 청문회에서 고함을 지르는 의원들 중 과연 스스로 떳떳하다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다수는 자신의 눈의 들보는 안중에도 없고, 다른 사람 눈의 티만 찾아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 않는가. 비린내 나는 그릇에 새 물을 담아도 비린내는 나게 마련이다. 결국 새 물에는 새 그릇으로 갈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불공정 사회가 된 것은 이제까지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지식만을 주입시키는 학교 교육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의 경우 법률이나 의학 분야처럼 전문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정치를 모르는 인기 유명인들을 뽑으면서 정의롭지 못한 불공정사회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70~80년대엔 육사, 90년대 이후엔 운동권 출신이 정치인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는 개인적 소양부터 소통 능력까지 갖춘, 제대로 된 인재가 선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명한 군인과 운동권 인사, 연예인이라도 국사(國事)를 논하는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 같은 사회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 모두는 그런 무뢰한을 뽑은 국민들도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MB정부가 후반기 국정 핵심 키워드로 설정한 공정사회가 진정성을 인정 받고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쩔 수 없이 장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땅이 기름지고 좋아야 씨앗이 잘 자라듯 성장기의 초ㆍ중고생 나아가서는 대학생들에게 건강한 신체를 기르고 예절, 배려, 리더십을 배우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체육과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인 윤리ㆍ도덕을 지속적으로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

입시 위주 수업에 밀려 체육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학생들은 운동부족으로 체력 저하 현상이 극심하다 보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고를 갖지 못한다.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성, 윤리, 도덕 교육을 통해 공정성에 대한 가치를 미래 세대에 심어주는 것은 토양을 다지는 것이다. 씨앗이 메마른 땅이나 바위에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공정의 기초를 처음부터 튼튼하게 하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교육과학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편은 매우 유감이다. 영수 과목으로 학교교육을 편중되게 만들고 윤리ㆍ도덕 과목을 위축시키는 식으로 인성교육을 경시하는 교육과정으로는 이 사회를 공정사회로 만들 수 없다.

공정사회는 정부의 정책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선 학교의 교장, 교사와 학부모들부터 어릴 적부터 운동장과 체육관에서 운동을 즐기며 사랑과 배려를 베풀 수 있는 인성교육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공정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즐기는 습관과 인성교육을 실시하면서 건강하고 건전한 정신의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그런 성숙한 사회, 밝고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해 본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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