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장수가 한 시간 동안 몇 번이나 가위질을 할까? 우문우답이 되겠지만 엿 장수 맘 대로다. 지우를 만나러 안국동에 가는 길에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이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교대의식’을 지켜보았다. 가끔 스쳐지나가면서 여러 차례 구경은 했지만 지금은 다른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수문장 교대는 새 경비 병력이 기존 병력과 대체하는 의례적 절차일 뿐이다. 따라서 교대를 한 병력은 숙소에 가서 쉬거나 다른 일을 하면 된다. 불안해하거나 다칠 일이 없다.

그러나 수문장의 교대가 아닌 ‘절대자’의 권력이 바뀐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그 절대자의 힘은 권력을 쥐면서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 하거나 불이익을 주게 될 것이 분명하다.

모 대학에 6년차 강사로 출강하는 후배가 있는데 지난 1학기에는 수강신청률(선택 교양과목)이 저조해 강의 시간이 배정되지 않았다고 개강 초 조교가 통보해왔다. 정작 그 후배가 섭섭했던 것은 자신이 시간 배정을 받지 못한 것 보다 다른 몇몇 강사는 6시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에는 총시간을 강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서 분하고 배신감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 후배는 평소에도 학생들이 무척 따랐고 또 졸업을 한 제자들이 문자를 보내거나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밀린다. 그 때마다 지우들이나 후배들이 더 열을 올리면 “학과장이 되어 강사하나 맘대로 못하면 되겠느냐”는 말로 일축하곤 했다. 현실을 불평하기엔 쓸쓸한 외길을 걸어온 강사의 자존심이 허락 할 수 없는 가보다. 결국 그들 마저 2년 이상 강의 경력이 있다는 학교 당국의 지적에 따라 개강 직후 그 후배처럼 모두 시간을 배정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후배가 2학기에는 강의시간을 배정 받았다고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후배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평소와는 달리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학기를 쉬면서 신규로 되어 학과에 강사채용서류를 다시 제출하러 갔다가 시간표를 보게 되었다. 일부 강사는 6~8시간, 심지어는 어떤 강사는 무려 10시간이나 배정을 받은 것을 알게 됐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시간을 많이 받은 강사들이 학과장과는 오랜 기간 상당한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은 비록 주 4시간을 받았어도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시간표를 보면서 배신감과 함께 허탈감이 왔다고 했다. 20여년 기자 생활을 마감한 나도 현재는 6년차 강사에 불과하지만 강사들이 강한 자에게 치이고 혹은 어쩔 수 없이 비굴해져야 하고 혹은 억울하게 엮여 빚어낸 사연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안다.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지다보니 항상 한 쪽은 ‘당했다’고 하는데 또 한 쪽은 ‘말도 안 된다’ 고 하며 거꾸로 노이즈 마케팅을 의심하는 불공평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힘만이 정의가 된 기분이다.

‘분’이라는 글자는 내 마음의 결기가 어떤 결과를 지켜보다가 못 마땅함 때문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그것이 쌓이면 울분(鬱憤)이 되는 것인데 분노(憤怒) 등의 단어로 전화(轉化)하면서 흔히는 ‘노여움’ 의 동의어로 바뀌게 된다. 결국 스스로 몸이 달아 열심히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리며 애쓰는 것이 ‘분’(憤)이다. 그래서 분발(憤發)이라는 조어(造語)가 가능하며 의지를 내서 강해지려 힘쓰는 모습을 흔히 발분도강(發墳圖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그 후배에게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인용, 조언을 했다. “한 농장주가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나 오후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심지어는 파장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하루 일당을 주는 것을 보고 일찍 온 많은 일꾼들이 불평을 토로했지만 그 일당(日當)을 어떻게 계산해서 지급하는 것은 농장주 마음이다. 마찬가지다. 학과장이니까 강사 시간 배정쯤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억울하면 출세하는 것 밖에 없다”고.

그 후배는 씨익 웃으며 “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대나무 밭에 와서 외친 사람 심정 알아? 그저 형에게 만이라도 인간 본능의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거야. 가슴에 담아두면 안 되잖아! 이렇게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어지는 거 아녀!! ”

억울한 감이 든다고 하지만 그 억울함과 배신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의해 강도 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큼이나 하겠는가.? 또 그나마도 강사를 못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는 가. 그에 비하면 명예는 잃지 않은 게 아닌 가. 그러면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감사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후배는 제자들을 대할 때 가르치는 학생들로 보기보다 자식 같은 마음을 갖고 항상 애정을 나누는 그런 사람이다. 언제나 쾌활한 그 후배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경제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 노동도 마다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삭막해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인성회복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사회봉사도 활발하게 하는 노력파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그의 ‘분’ 함이 더 큰 계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보여 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는 느낌이 든다. 바람이 있다면 1년에 절반 가까운 5개월을 무급으로 있음에도 불구, 재직기간 2년이 되면 한 학기를 쉬고 다시 신규로 채용되는 모순은 없었으면 한다.

또한 학과에서 공정한 시간 배정 등 강사로서의 기본권을 보장 받고 방학기간 중에도 떳떳한 대우를 받는 밝고 맑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아무리 가위질 엿 장수 맘 대로라지만 최소한의 생계에 대한 자존심만은 살려줘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2년은 보장 받는 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매 학기마다 학과장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있는 강의를 할 수 있다. 현행 제도로는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가는 것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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