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필연적으로 공생의 삶을 살게 돼있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알게 모르게 은혜를 입고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때로는 본의 아니게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르며 살기도 한다. 어찌 보면 배은망덕한 일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솝우화 가운데 포도넝쿨에 몸을 숨겨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슴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포도넝쿨을 따먹었다. 그러자 넝쿨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온 사냥꾼들에게 사슴이 잡혔다. 이 때 사슴은 ‘이건 당연한 이치다. 나를 죽음에서 지켜준 나무를 먹으려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며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슴처럼 입장이 바뀜에 따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인간사에도 비일비재하다. 본의 아니게 해를 입혀 도와준 이를 곤란하게 한다든가 도와 준다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르는 때도 종종 있다. 자신의 실체를 밝게 알지 못하는 탓에 사람들은 맹목적인 자기 보호본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이런 자기애(愛)가 서로 충돌할 때 서로 미워하게 되고 원한마져 품게 된다.

불가의 이야기다. 바라문의 집에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곱추였다. 머리가 영특한 그는 유학을 가서 학문과 기예를 익히고 박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그는 외모는 출중하나 천한 일을 하는 젊은이를 술사로 내세워 왕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그 젊은이의 수제자처럼 행세하며 나라일을 거들었다. 바라문이 뒤에서 열심히 내조하면서 나라의 일을 잘 수행해 나갔다.

그러자 젊은이는 나라에서 상도 받고 권력도 얻게되었다. 그는 점차 바라문을 업신여기며 교만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당신 덕에 사는 게 아니라 내 복에 사는 것이고 당신은 한낫 내 수행원에 불과하오” 그런데 얼마 후 이웃나라에서 쳐들어 왔다.

왕이 젊은이에게 나라를 구할 것을 명했지만 젊은이는 겁에 질려 코끼리 등에 오줌까지 싸며 달아났다. 혹시나 해서 그를 뒤좇아 온 바라문은 자신이 직접 이웃나라 왕과 싸워 왕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큰공을 세운 바라마에게 왕은 큰 벼슬과 땅을 상으로 주었고 많은 백성들은 바라문에게 소취궁 박사라고 불렀다.

바라마는 자신을 배반하고 업신여긴 젊은이에게 살아갈 재산을 주며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그 은혜를 감추거나 갚지 않는 것도 배은망덕이지만 잊는 것은 더 큰 배은망덕이다. 이런 배은망덕한 일을 당하는 순간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자란 바라문처럼 배은망덕한 행위조차 복수심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현자란 대자비의 사상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바라문은 현자로서 젊은이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깨우치게 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비록 남이 나를 배반할지언정 이를 이유로 내가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 아픔이 크다해도 복수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얼마 전 모 시장이 단행한 보복성 인사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시교육 의원에 당선된 사람이 자신을 해직시킨 해당학교에 엄청난 자료를 요청, 보복성 행위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그 의원은 친전교조교사로서 과거 ‘효순이 미순이 사건 때부터 광우병 문제에까지 촛불 시위를 주도하는 등 반미성향을 갖고 있으며 현 서울시교육감의 직계다. 그런 영향으로 학교에서 해직 됐는데 전화위복이라 할까 그는 해직교사라는 이름과 진보세력바람 덕에 교육의원에 근소차로 당선이 됐다.

그러면서도 선거 홍보물에 다른 약력은 다 넣으면서도 뭔가 깽기는 것이 있는지 전교조 경력은 뺐다. 더구나 교회 집사로서 겉으로는 사랑과 용서를 내 세우면서도 권력의 힘이 주어지자 복수를 하기위해 칼을 빼들었다. 신앙인도 아니다. ‘피는 피를 뿌리고 길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참교사를 자처하는 그 분이 자신의 위치가 공인임을 인식하고 집사같은 ‘참 집사’가 되었으면 한다.

같은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 기고만장한 마음으로 교육에 간여 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펼 수 있을까 그런 자세의 교육의원.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하다. 관할학교와 피해를 보게될 학생들이 애처럽고 사뭇 걱정 된다.

“얼음을 받았으면 빙수를 내놓아야지 어찌 얼음조각을 그냥 내놓으면 어떻게 하느냐?”이는 설령 상대가 부당하드라도 이를 그대로 되받아치는 것은 아무 공덕이 되지않는다는 말이다. 차갑고 거친 마음을 받았을지라도 내 따뜻한 마음으로 부드럽고 지혜롭게 얼음덩어리를 짤게 갈아 빙수를 내놓으면 시원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풀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게 될 때 당장은 아니더라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런 계기를 현자는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지난 주 몇몇 목화자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갔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50대 말, 60대 초반이라 야산에 올랐는데 등반 도중에 글을 쓰는 내가 컴퓨터가 없다는 걸 알게 된 목사 한 분이 자신도 어려운 목회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백여만원 상당하는 노트북을 사주셨다.

고맙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베푼 은혜를 알고 인사라도 해야 덜 미안할 것 같아서다. 그 동안 컴퓨터가 없어서 설교문이나 칼럼도 육필로 작성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기독교에서의 ‘사랑’ 불교에서의 ‘자비’ 가 바로 이렇게 은혜를 알고 베풀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게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어진다해도 그 때마다 함께 흔들릴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 상대가 아닌 나부터 얼음을 갈아 빙수를 내놓을 때 누군가의 찌는 가슴에 시원한 냉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무덥기만 한 한 여름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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