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매년 이맘때면 전국적으로 절반 이상의 국민들이 고향을 찾아 고행(苦行)아닌 고행을 자처하며 민족 대이동을 한다.

이처럼 설이 되면 보여 지는 대이동은 전통존중의 풍습과 더불어 한 민족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문화적인 풍요로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도 세월의 변천에 따라 대가족 제도의 붕괴, 다양한 외국문화의 도입 등으로 이제는 음력설을 단순한 연휴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조상에 대한 차례는 제처 두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심지어는 휴양지에서 제사 음식을 배달시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또 사찰에다 계약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측도 있다고 한다.

그런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설을 맞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로 도로가 막히긴 하지만 차 안에서의 그 길고 긴 시간을 고통스럽게 여기며 길 떠난 것을 후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고통 뒤에는 그리운 부모와 함께 형제자매와 친척들 그리고 코흘리개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갈 수 있다는 즐거움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런 설레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길 위에서 느끼는 고통을 감수하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설을 기다리는 추억의 조각들을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우선 설이 되면 빠질 수 없는 게 긴 가래떡을 비스듬하게 썰어 만든 떡국일 것이다.

차례상에 올렸던 떡국을 먹으면서 덕담도 나누고 또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또 조상께 드리는 차례가 끝나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세배 돈 받는 즐거움으로 설을 기다려 왔다. 그 중에도 설 때가 되면 엄마가 사다주신 새 내복을 설빔으로 얻어 입고 얼마나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던가. 거기다 운동화까지 얻어 신으면 정말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이 되기도 했지.

60년대 당시는 또 왜 그리 추웠는지 설날 오후 햇볕 쬐는 담장에서 코흘리개 친구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세배 돈 대신으로 받은 약과 등을 먹으며 부모님의 고생은 생각지도 않고 희희덕 거리며 즐거워하던 어린시절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요즘은 그런 설빔이 없어져 다소 아쉽기도 하다.

또 전날 밤에 일찍 자면 눈 섭이 하얗게 된다고 늦도록 잠을 못 자게 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 또 어머니가 차례상 준비를 위해 만들어 놓은 음식을 슬쩍하다가 들켜 꾸지람을 듣던 시절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아무튼 그런 추억의 설이 역시 여자들에게는 힘이 들고 귀찮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주부들에게 ‘명절증후군’ 이라는 신종 용어까지 생겨났을까. 더욱이 맏며느리는 더욱 힘이 드는 것 같다.

우리 집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종가집이기도 한 우리 집의 경우 항상 아내 혼자 차례음식을 준비하고 심지어는 설날 뒤치닥거리까지 혼자 도맡아 한다.

흉 같지만 하나 있는 제수는 설날 아침에 와서 해놓은 밥만 먹고 친정 간답시고 훌쩍 가버린다. 그럴때도 착한 아내는 항상 “철이 없어 그런 거니까 아무 말도 말라” 며 고기와 과일을 싸주기까지 한다. 역시 맏며느리는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 같다.

이번에도 자청해서 내가 집안을 치웠는데 힘이 들어 끙끙 소리를 내니 아내가 웃는데 그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또 까놓은 밤은 성의가 없다며 늘 알밤을 사오는 덕분에 그 많은 밤을 껍질을 벗기고 까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엎치락뒤치락 했더니 아내가 그만 두라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차마 일손을 놓을 수 가 없었다.

작은 딸이 닭살 돋는다는 소리를 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아내의 종알종알대며 떠드는 수다를 밤늦도록 들어주었다. 내 어머니가 하시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아내가 자리를 하고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낼 음식을 만들고 있다.

아내와 딸의 그런 모습 속에서 따뜻한 가정 소중한 가족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준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의 넋을 기리고 감사하며 설의 아침을 맞이했다.

설이란 예부터 정월 초하루 단 하루만이 아니라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우리 고유의 명절이다. 오늘의 이 맘으로 풍농(豊農)을 기원하고 함께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되자. 그래서 항상 즐거움과 기쁨만으로 남아있을 추억어린 설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자. 아울러 "복많이 받고 부자되세요" 라는 인사보다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라는 덕담을 나누며 을유년을 시작하는 우리가 되자.

논설위원 안호원(한국심성교육개발연구원장,서울정보기능대학겸임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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