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TV를 켠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역겨운 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거짓가면을 쓴 정치꾼들이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며 국민을 기만한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란 가사가 절로 나온다. 족히 100개가 넘을 듯싶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닥이 듣고 싶은 채널이 없다. 별수 없이 ‘리모 콘’을 내려놓으면서 긴 한숨을 내쉰다.

영국 정치사상가 존로크가 법과 행정을 분리하는 이권분립을 주장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공개된 법률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한다.”며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가 로크의 이권분립을 삼권분립으로 확장했다. 그는 ‘법의 정신’ 등에서 “사법이 입법과 행정에서 독립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면서 사법부 독립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권분립의 역사는 불과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삼권분립의 철학적 배경은 분리(分離)가 아닌 분립(分立)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의 나라인가? 답은 ‘아니다.’다. 삼권분립은 이미 문 정권 들어서면서부터 실종되었다. 시대를 거슬러 왕권국가로 퇴보됐다. 집권초기부터 검찰개혁이란 명목으로 적폐청산을 위해, 임기를 반 이상 소모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사법개혁, 경찰개혁, 심지어는 언론개혁을 빙자해 언론협박 법(?)인 신문. 방송 등 언론에 대한 최대 3배 ‘징벌 적 손해 배상 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가짜 뉴스를 명분으로 재갈을 물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국민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언론 방송 장악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 것 같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통해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에 근본적인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민법상 손해배상 제도나 형법상 형사처벌 제도와 중첩돼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에 위반될 소지도 크다. 한 술 더 떠 법관 탄핵 주도한 황운하. 김남국, 김용민. 최강욱 등이 ‘중대범죄수사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 했다. 앞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설치안을 통과시키면서 검찰에 남겨 둔 6대 범죄 등 주요범죄(부패, 경제, 공직자, 선거, 방위산업, 대현참사)직접 수사 기능을 없애겠다는 취지다. 이들은 하나 같이 검찰이 형사사법 절차 전반을 지배하는 절대강자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백 전 장관 영장 기각을 계기로 검찰을 향한 공세를 재개하며 원전에 대한 정치 수사를 즉각 중단 할 것을 촉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을 향해 공세를 펴는 이들 대부분이 현재 피의자신분이다. 또 고소 고발당하거나 피의자 신분인 조국, 추미애, 박범계, 삼종세트, 이용구까지 인사청문회와는 관계없이 연달아 법무부장. 차관에 임명되었다. 그런 부적격자에게 법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대통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했을까? 임기 후 보장? 뜻대로 이뤄질까 우려 된다.

국정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다. 막장까지 갔던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이 끝나는가했는데, 이제는 사법부에서 시즌2가 시작되고 있다. 태산과 같은 무게로 사회를 지탱해야 할 사법 기관들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국정은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실감 난다. 탈 원전, 4대강 보 철거, 환경부 블랙리스트 같은 무리수들도 부메랑으로 돌아오면서 공직 사회도 혼란스럽다.

대통령부터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비상식이 상식을 뛰어넘어 현존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정치권도 막장으로 국민들이 절망감에 빠졌는데, 대법원장과 고법 부장판사의 적나라한 진실공방에 많은 국민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우리 사법 시스템도 자폭에 이를 만큼 오류가 누적되었다. 그야말로 국회 개혁을 시작으로 검찰, 사법, 언론, 경찰개혁이 국민의 힘(국민)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법관의 양심이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었고, 사법부 독립이 입법부 발아래로 무참히 떨어졌고, 헌법 질서를 무너뜨린 그를(부장판사)탄핵하겠다고 앞장섰던 이들은 법복을 벗자마자 정치에 뛰어들어 금배지를 달았다. 누가 바이러스고, 누가 백혈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 판사의 양심, 법관의 독립, 삼권분립의 헌법 원칙이 모두 염증의 폭풍에 휩싸였다. 국민 앞에선 삼권분립을 강조하고, 뒤로는 정치눈치보기에 급급했다.

최상의 가치라던 재판의 독립, 판사의 양심은 사법행정과 사법개혁의 이름으로 제물로 던져졌다. 이념으로 갈린 법원 구성원들은 상대진영의 이율배반을 탓하다 ‘내로 남불’의 늪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거대 영당인 민주당 주도하에 이뤄진 판사 탄핵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3권 분립 파괴 ‘거짓말’ 파동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검찰총장도 그랬지만 사법부 역시 사법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닉슨 대통령도 사건 발생 이후 2년 넘게 버티어왔으나 은폐했던 18분 분량의 백악관 집무실 녹음테이프 제출을 연방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하자 마침내 손을 들었다. 수사 중지 명령을 하고 국민을 속여 왔음이 만 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닉슨은 대화 비밀 보장과 면책특권을 주장했지만 관철되지 못했다. 워런 버거 대법원장은 닉슨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정의와 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의 연방대법관들이 ‘Justice’로, 연방대법원장이 Chiet Justice’ 불리는 이유가 다 있다. 법치주의가 적절히 기능하려면 제도와 절차만큼 규범적 문제가 중요하다. 국민들이 법을 존중하고 따르게 하려면 그 법이 근본적으로 공정하다고 믿고, 사법부가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한다.

헌법에서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고, 법관의 신분보장을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최후 보루로서 헌법과 법치주의를 수호하라는 국민적 명령의 표현이다. 파격 발탁된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부 독립을 확보하기는커녕 임기 동안 특별히 남긴 것이 없을 정도로 소일했다. 참담하다.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이념과 성향을 같이하는 특정 그룹 판사들이 대거 중용되면서 사법의 정치화와 공정성에 대한 우려가 심각하다. 본인은 극구 부인으로 일관했지만, 공개된 녹취록에서 대법원장이 권력 앞에 굴복하고 법관 탄핵을 방조한 것으로 의심되던 정황이 사실로 드러났다. 명예와 신뢰의 상징이어야 할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대한민국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가득이나 실추된 사법부. 누가 신뢰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런 거짓말하는 판사의 판결을 얼마나 신뢰 할 수 있겠는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앞에 근조 화환이 130여개나 진열되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정치 중립 위반과 거짓말 논란을 규탄하는 의미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보낸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족들 앞에서 무슨 낯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김 대법원장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묻고 싶다. 사법부는 무엇인가. 정의와 법치주의는 무엇인가? 진실은 오로지 은폐를 두려워할 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으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고 했다. 지금 서울법대 동문들, 선후배 판검사들이 모두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제도의 신뢰와 사법부 구성원의 명예를 위해 더는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 멈추고 나갈 때를 아는 것(知止)이 지혜의 으뜸이다. 어느 부처를 망론하고 모두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문 정권 들어 진보 진영 곳곳에서 묻히고 짓눌렸던 크고 작은 내로 남불과 이율배반의 오류는 폭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시스템의 사소한 오류에도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대형 시한 폭탄을 품고 살게 되었다. 삼권분립 훼손을 두고 논쟁이 한창이지만 분립의 원칙에 비춰보면 답은 이미 정해졌다. 분립하지 못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유지하고 완성으로 이끄는 건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삼권분립 은 언제나 되찾을 수 있을까. 꿈으로 끝날 것인가.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인.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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