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 ‘내 생애 이보다 더 무능한 정권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 정권이 들어서니까 너무 무능했다” 며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건 게 ‘도덕적이기는 하잖아’였는데, 조국 사태 이후로 이 도덕성마저 무너져 내 인생 최악의 정권을 이렇게 만나는구나 싶어 참담하다”고 한 시민은 나름 고충을 털어놓으며 긴 한숨을 내쉰다. 이어 그는 “처음에는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은 분노를 떠나 허탈감에 빠져 우울 증세를 보일 정도다. 어제는 TV 뉴스에 보기 싫은 사람이 화면에 나와 자칫 TV화면을 깰 뻔 했다.”고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특히 지금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겠지만, 그전부터 경제는 망가져 있었다.” 며 “가장 걱정되는 게 20년쯤 후에 제가 이 건강보험의 수혜자가 될 때쯤 아마 받을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어려워도 나라를 이처럼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한탄했다.

정말 대통령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왕(王)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성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으로 쓰이는 한자가 聖(성)자다. 음악(音樂) 최고 고수는 악성(樂聖), 바둑의 최고 고수는 기성(棋聖), 詩의 최고 고수는 시성( 詩聖), 인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성인(聖人) 등으로 불리며 추앙을 받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 경지 핵심에 있는 「聖」 자는 耳(귀)와 口(입) 그리고 王(왕)자의 세 글자의 뜻을 함축한 글자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성공적으로 올랐을 때 만 붙여주는 성(聖)자를 쓰는 순서는 耳(귀)자를 맨 먼저 쓰고, 그 다음에 口(입)자를 쓰고, 마지막으로 王(왕)자를 쓴다. 그냥 쓴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성공의 필수 조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耳(귀)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귀로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 때문에 입(口)을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王)’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 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 것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공자(孔子)도 60세가 되어서야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먼저 모두 다 듣고 나중에 말을 하는 것이다. 고사 성어에 이청득심(以聽得心.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여 듣는 다는 뜻)이 고사 성어를 도외시하고 최고의 성공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다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耳順.the sixtieth year)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를 하는 경지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걸 관용하는 경지다. 말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하는데, 이순(耳順)의 내 귀에 지금도 거슬리게 들리는 말(言語)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수양(修養)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여기에 더하여 아직도 듣는 것은 뒷전이고 말이 먼저 튀어 나오고 있으니 이걸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순’이 훨씬 넘은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다. 정말 이 나라를 ‘아무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로 망하게 하는 건 아닌지 많은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각 부처장(장관)이 발표 할 내용까지도 직접 나서 국민들을 양분화 시키는 등 분열을 조장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은 조국, 윤미향, 추미애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대통령.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에서 침묵은 ‘말하지 않고도 듣고, 속삭인다.’고 했다. 그래서 침묵은 상징의 언어이기도 하다. 시(時)도 때(日)도 없이 나섰던 문 대통령이 추미애 사태를 풍자한 ‘추미애 연가’ 가 졸지에 국민애창곡이 된 ‘카튜사’ 가 시중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도, 병역을 필한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지만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다. 흔히 이를 전략적 계산이 깔린 ‘침묵 정치’라고들 말한다. 문 대통령의 침묵은 선택적이다. 적과 동지, 네 편과 내편에 따라 철저하게 결정한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지난 해 3월 이른바 문 정권의 단골메뉴인 ‘적폐’ 들을 겨냥한 ‘장자연,’ ‘김학의’ 사건의 재수사를 신속하게 지시하던 때는 다들 보란 듯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소리쳤다. 아니 외쳤다.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다.” 일갈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난 조국 가족비리 때나 한 달 이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추미애 아들 병역 특혜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지난 21일 오후 영빈관에서 열린 국정원과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 개혁 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오히려 야당 보란 듯이 추미애 법무부(法無婦)장관과 동시 입장하면서 추 장관을 추켜 세워줬다. 문 대통령은 "검찰과 경찰이 합심해 인권보장 규정을 마련한 것은 매우 잘 된 일"이라며 "앞으로 국가수사 총역량을 감소시키지 않고 유지해 나가면서 인권 친화적(?) 수사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권력기관 개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진척을 이루고 있다" 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국정원과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 개혁 전략회의를 가진 것은 지난해 2월 이후 1년 7개월만이다. 굳이 전략회의를 갖지 않아도 되는 데, 속이 보이는 짓을 했다는 게 정치계 중론이다. 야당뿐만 아니라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침묵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추미애의 오만 방자함으로 성난 민심에 전혀 동의 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조로남불’ ‘추로남불’ 소리를 듣는 이들 두 남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유는 조국과 달리 추미애가 무너질 경우 검찰개혁이 수포로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청년의 날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공정’ 이란 단어를 37번이나 외쳤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바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청년들은 여전히 ‘공정’에 목말라 있지 않은가. 문 대통령도 ‘여전히 불공정하다는 청년들의 분노를 듣는다.’ 고 말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또 공정을 말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차라리 불공정에 분노한 청년들에게 솔직하게 참회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청년들이 폭발한건 ‘아빠 찬스’ ‘엄마 찬스’다. 그런데도 못들은 척 문 대통령은 답을 주지 않았다. ‘조국’의 ‘조’자도, ‘추미애’의 ‘추’자도 ‘김흥걸’의 ‘김’자도, ‘윤미향’의 ‘윤’자도 입 밖에 벙긋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공정을 약속한 대통령과 정부가 불공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기득권이 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진실을 부정하고, 자기들만의 가공된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지자들 역시 그들이 만든 허구의 세계에 매몰돼 진실이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어쩜 민주화 세력의 약점일 수도 있다.

2018년 1월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 시절 신년사가 생각난다. “논어와 목민심서에서 불환빈(不患貧) 환불균(患不均, 백성은 배고픔보다 불공정한 것에 더 분노한다고 했습니다.” 또 지난 해 12월 인사청문회 때는 “불환빈 환불균이라는 논어의 구절처럼 국민들은 배고픔보다 불공정한 것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 추 장관 아들 병역 특혜 의혹에 ‘반칙과 특권’을 의심하고 추 장관의 거짓말에 격분하며 불공정함을 느낀 젊은 층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대통령이 37번이나 ‘공정’을 외쳐댔지만, 감동을 주지 못했다.

말대로 실행하면 바로 된다. “‘공정’이 새롭게 구축되고 청년들이 공감하려면, 채용, 교육, 병역, 사회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체감되어야 한다.”고 대통령은 또 말했다. ‘앞으로....’라는 단어를 굳이 쓸 필요는 없다. 단 한번이라도 측근의 불공정에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추상같은 칼질을 하면 바로 ‘공정’을 체감할 수 있다. 뻔질 한 말잔치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 늪에서 허우적 거려봐야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다. ‘물러나는 권력은 있어도 물러나는 국민은 없다.’ 정치는 생물(生物)이라 ‘영원’하지도 않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인.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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