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玉)은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옥에 티’라는 격언은 ‘옥’의 완벽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하자(瑕疵)’는 옥에 있는 흠결(欠缺)을 지칭한다. 지금은 결점. 고질병이란 의미로도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 진짜 민주주의 사회로 가기 위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요즘 정치계의 작태를 보면서다. 자연스럽게 플라톤의 ‘국가론’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상소문 형식의 국민청원 게시 글인 이른바 ‘시무 7조’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진인(塵人) 조은산이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란는 제목의 청원 글과 관련한 풍자와 패러디가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도 게시 글로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다. 청원자 수도 엄청나 답변 요건(20만 명 동의)을 채웠다. 해당 글이 접수 된 이후 공개되기까지 15일이 소요되어 논란이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이 청원에 대해 과연 청와대가 어떤 답을 국민들에게 내놓을 것인지 자못 궁금한데 어찌된 까닭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같은 상소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초의 상소문은 조선 말 현종 때인 1846년 평양기생 초월이 쓴 상소문이다. 15살 어린 기생이 쓴 2만자 넘는 상소문은 거침이 없었다. “좋은 얼굴을 한 큰 도적이 조정에 가득해 국사를 어지럽히니, 신하는 강도가 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어 도탄에 빠졌다.” 며 조정 세태를 한탄하고 “임금의 자리에서 밤늦게 술을 마셔 눈이 게슴츠레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다.” 며 술에 빠진 임금을 질타했다. “3정승 6판서로부터 문무백관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문무 제신들의 행각을 낱낱이 밝혀서 고(考)하겠다.”면서 실명으로 고관들의 부패상을 조목조목 명시했다. 평범한 백성들이 쓴 송곳 같은 상소문이 국민들 마음을 흔드는 일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대선을 앞둔 지난 1992년 50대 중반의 은행 지점장이 80여 항목의 상소문을 엮은 ‘신문고 ; 제7공화국에 올리는 상소문’책을 펴내 당시에도 상당한 반응을 보인바 있다. 이어 2000년에는 30대인 계장 급 현직 공무원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신(新) 단성 소’란 제목으로 쓴 소리를 올려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 명조 때 남명 조식의 사직상소문 ‘단성 소’를 모방한 이 상소문은 “각하는 장막에 둘러싸여 밖의 소식에 막힌 구중궁궐 속 늙은이”라며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이번에 국민들의 관심사가 된 ‘시무 7조’ 청원은 특히 부동산 정책과 관련한 정부 인사들을 비판한 대목에서 절묘한 운율로 ‘이행 시(詩)’를 만든 게 알려지면서 화제꺼리가 되고 있다. “‘현’ 시세 11%가 올랐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 “‘해’괴한 말로 백성들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고,” “‘미’ 천한 백성들의 ‘애’ 간장을 태우고 있사온데”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문장의 앞 글자를 모아보면 ‘(김)현미. (이)해찬. (추)미애’가 된다. 추미애는 ‘애미 가 추한 논’ 으로도 희자 되는 등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쿠데타가 있다.”민주주의 사회에서 군사 쿠데타의 시대는 확실히 끝나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

러나 ‘민주주의 가면을 쓴 무도회’는 가능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학 데이비드 러시먼 교수는 “공약성 쿠데타, 행정권 과용 같은 쿠데타는 외견상 민주주의 형태를 유지 한다.”고 했다. 공약성 쿠데타는 ‘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장악하는 것’이다. 또 행정권 과용은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 번에 민주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체제를 조금씩 약화시키는 것’ 이다. 러시먼 교수는 “특히 행정권 과용은 21세기에 민주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민주화 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지금의 문정부와 집권여당이 거꾸로 민주주의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민주주의의 일그러진 현실을 보면 과연 우리가 저들(?)말처럼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국회의 독단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집권여당이 단독으로 압도적 대승을 거두면서 과반인 176석을 확보 한 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다수의 힘을 등에 업고 여권은 무소불위의 행정권. 입법권을 입맛대로 휘두르고 있다.

공약성 쿠데타. 행정권 쿠데타를 연상시킬 정도로 찬바람이 분다. 법안 통과엔 마치 ‘일사천리’의 원칙이라도 있듯 벼락치기다. 어떤 입법이건 공청회 등 사전여론 수렴 과정이 우선이고 필수적인데 그렇지 않다. 인사 청문회도 지켜지지 않는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성급한 입법은 이해당사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일시에 대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국민 과반수가 반대하는 공수처 신설도 밀어 붙이더니, 지나친 시장 통제. 감시와 개인정보, 재산권 침해 위험이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시장 감독기구 설립을 강행했다. 부작용이 만만찮은 ‘임대차 3법’을 졸속으로 밀어붙인 건 시작에 불과하다. 논란이 일고 있는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도 일사천리로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다수결만 신봉한다면 독재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정책’이란 그리고 ‘정치’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와 집권여당과 국회는 늘 일방적이다. 지지층만 고려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는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고 있다. 자기편에는 자비로우면서도 남의 편에 대해선 가차 없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고 여당 인사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소신을 굽히지 않자 ‘핫바지’로 만들고 그것도 부족해 최재형 감사원장도 입맛에 안 맞다 며 도를 넘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현상은 과거 독재시절보다 더 심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요즘 항간에서는 부쩍 ‘독재’라는 용어가 떠돌고 있다. 한때 문제인 캠프에 있었던 한 인사는 ‘대깨문’을 야비하고 혹독하다고 비판을 했다. 그는 또 “아무리 위대한 달님(문 대통령)을 향한 충성심을 일편단심으로 나타내건 말건 ‘대깨문’은 민주주의 부적격자.”라고도 했다. 실제로 그들의 장악한 댓글 판은 가히 무례함과 심성의 삭막함을 넘어 저질스럽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문빠에 부회뇌동하는 여권의 정치인도 문제다. 청와대 국민청원 ‘8.15광화문 시위를 허가한 판사의 해임 청원이 하루만에 20만 명을 돌파하자 여당 의원들이 이 결정을 한 재판장 이름을 거명하며 판사 이름의 ‘금지법’을 발의했다. 국민의 안전과 생존권을 위해서란다. 2016년 ‘촛불집회’도 매번 허용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건가. 코로나 확산 방지는 행정부의 일이고 시민 정신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다.

법은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맞다. 법을 흔들어 특정 대중에 아부해선 안 된다. 시국이 어수선해서일까. 툭하면 ‘엄벌’ 경고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에게 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강력한 처벌을 내릴 거라고 겁박한다. 그리고 간호사단체와 분열을 조장한다. 이에 앞서 코로나 재 확산에도 기독교계에 그 책임을 떠넘기며 국민들을 양분화 시키려고 했다. 서슬 퍼렇던 독재시대의 데자뷔 인가. 코로나 재 확산, 의료계 반발 이 모든 게 정부가 잘못한 실책임에도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려고 했다.

여론을 충분히 경청했다면 코로나 19 시대에 이런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소 문 이란 오랜 형식이 지금도 이렇게 공감되는 건 글쓴이의 필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 상소문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설을 날리는 배포와 기개가 충만했다. 바로 그 배포와 기개의 정신이 2020년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여권에 당부를 하고 싶은 게 있다. 진정 입버릇처럼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반대편은 무조건 적으로 돌리는 ‘적화적폐 놀이(敵火.積弊)’는 이제 끝냈으면 한다.

속보이는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무도회는 이제 끝을 내자. 자기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보고 손가락질 하지 말라. 성경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 받을 것이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 이라고 질타한다. 이제 과거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시민의 저력을 다시 깨워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동면(冬眠)’하는 개구리가 아니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인.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메디팜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