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임금과 양잠3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성종 5(1474)년 7월 29일 임오(壬午) 4번째 기사에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재주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중재(重宰)가 되어 고을을 순행하며 민폐를 찾게 되니, 보고 듣는 것이 있으면 곧 아뢰려 하였는데, 이제 구언(求言)의 분부가 계심에 따라 삼가 한두 가지 일로 우러러 성청(聖聽)을 번독(煩瀆)합니다.

태인현(泰仁縣)에 잠실(蠶室)을 두어 도회관(都會官)으로 삼았는데 양잠(養蠶)에 쓰는 제구는 다 백성의 힘에서 나오며, 수납(收納)할 때에 간사한 서리(胥吏)가 인연하여 농간하므로 크게 민폐가 됩니다.

한 해에 바치는 것은 고치 50두(斗)와 실 40근(斤)이므로 그 공상(供上)하는 것은 매우 적은데도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실로 많습니다.

또 양잠의 일이 부실하여 그 액수를 채우지 못하면 백성에게서 값을 거두어 사서 바칩니다. 이 때문에 태인에 사는 백성이 홀로 그 폐해를 받으니 이것은 양잠으로 이름 지었으나, 실은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해에 바치는 실과 고치의 액수를 여러 고을에 분배하면 본도의 53고을에서 각각 바치는 것은 몇 말 몇 되와 몇 근 몇 냥에 불과하니, 이렇게 하면 도회 근방에 사는 백성이 그 폐해를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그리 하라."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지방 서리(胥吏)들의 농간으로 농민들의 피해가 있었으며, 이들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조정에서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종 6(1475)년 2월 24일 계묘(癸卯) 7째 기사에는 호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전교를 받들어 보건대, ‘진언(陳言)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양잠(養蠶)이 비록 중하기는 하나, 백성의 폐해(弊害)도 많습니다. 태인 도회(泰仁都會)의 폐해로써 말하면, 거기에 소용되는 솥[鼎釜]·자리[薦席]·편모(編茅)·점박(簟箔)·질그릇단지[陶盆]·유기(柳器)·목반(木盤) 등의 물건은 연한을 정하여 거두어서 쓰고, 미두(米豆)·탄시(炭柴)·지지(紙地)·등유(燈油) 등의 물건은 해마다 거두어서 쓰므로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오는데, 거두어 모을 때에 해당 관리가 이로 인하여 간사한 짓을 하니, 그 폐단의 첫째입니다.

누에가 나오면 추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1백 50간(間)의 잠실(蠶室)을 모두 온돌로 만들어서, 날마다 소용되는 땔나무[燒木]와 불피우는 숯[熾炭]의 수량이 매우 많이 드니, 그 폐단의 둘째입니다.

매년 농삿달에 근방 여러 고을의 백성을 부려서 잠실을 수리하게 하니, 그 폐단의 셋째입니다. 거기에 쓰는 집기(什器)를 삼가서 간수하지 아니하여 연한도 되지 않아서 문득 없어지므로 할 수 없이 또 여러 고을에서 나누어 정해서 거두어 쓰니, 그 폐단의 넷째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의논하여서 계달하라.’고 하였습니다.

신(臣) 등이 《대전》을 자세히 살피건대 ‘여러 도(道) 가운데 뽕나무가 잘되는 곳에 잠실을 짓고, 관찰사가 본고을과 부근 여러 고을의 공천(公賤)으로써 인부를 요량하여 정한다.’라고만 기록하였고, 거기에 쓰이는 집기(什器)는 기록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임시하여 준비하므로 폐단이 진실로 작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경중(京中)의 잠실의 예에 의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먼저 양잠할 잠종(蠶種)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쓰는 집기를 요량해 정하고, 해마다 얻는 명주실[繭絲]의 정조(精粗)를 구분하고 다과(多寡)를 계산하여 수량을 조사해서 계달하게 하며, 여기에 의거하여 상벌(賞罰)을 논하도록 하소서.

또 잠실 1백 50간이 있는데, 모두 짚으로 덮으므로 해마다 수리하는 데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여러 고을에 별관(別館)이나. 빈 관아(官衙)가 있으면 구들을 놓아서 옮겨 기르게 하여, 그 폐단을 덜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국가의 부국책으로 장려한 양잠이 오히려 농민의 부담을 가중 시키는 피해가 발생하여 조정의 근심이 많았다.

성종 6(1475)년 4월 12일 경인 2번째 기사에는 병조(兵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재인(才人)과 백정(白丁)들은 농업과 양잠을 일삼지 않고 사냥과 장사를 업(業)으로 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호구책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군대[卒伍]에 예속시키고 부역(賦役)을 편호(編戶)와 같게 한다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모여서 도적이 됨으로써 오히려 양민(良民)을 해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청컨대 살림이 조금 넉넉하여 군오(軍伍)에 편입되고자 하는 자는 이를 허락해 주고, 산업(産業)이 없는 자는 부역(賦役)을 정하지 말고, 한전(閑田)을 지급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수십년을 기다려서 부실(富實)하게 된 다음에 부역을 정하도록 하소서.

또 앞으로는 재인(才人)·백정(白丁)이라 부르지 말게 하고, 일반 백성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게 하고,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그들에게 지급한 전토(田土)의 수를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국사편찬위원회, 성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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