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우(知友)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되면 저녁에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 지우는 중국에 의류공장을 세워 놓고 한때는 모두가 부러워했던 사업가였는데 수출이 막히면서 기업이 망해 재산을 깡그리 잃고 월세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그는 가장(家長)으로서 가족(家族)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리운전기사를 하다 지금은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다. 60세가 다 된 나이에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지고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기도 했고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여 반사다.

그는 삶을 투쟁하며 살고 있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던 때를 못 잊어하며 ‘내가 왜 이 나이가 되어 힘들게 살아야 되느냐?’ ‘나는 이렇게 살 여자가 아니다’라며 여전히 친구들 앞에서 허용을 부리려고 한다. 남편은 삶을 투쟁하며 살고 있는 데 아내는 삶을 투정하며 살고 있다.

그 지우의 말을 듣다 보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삶을 투쟁하며 사는 것’과 ‘삶을 투정하며 사는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우는 삶을 투정을 할 여유가 없다.주어진 삶을 어떻게 하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파른 언덕길을 헐떡이며 오르내리고 간혹 처갓집이라도 갈라치면 처가 식구들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옛날 잘 나갈 때(기업)의 사위를 대하던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구박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어깨는 처가의 구박보다는 가족이라는 짐이 더 무겁게 짓누르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귀가한 남편에게 싸늘하게 대하며 남편의 무능을 탓하고, 그런 남편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투쟁을 하며 살고 있는 남자의 남은 한 가닥의 힘마저 삶을 투정하는 아내가 모두 다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실감한다. 우리들에 가장의 이야기다. 한 가정에도 지우의 가정처럼 투쟁하며 사는 사람과 투정하며 사는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쟁하며 사는 것도, 투정하며 사는 것도 모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인생의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 사람으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서로가 지탱할 힘이 되어주고 그 무거운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

그 지우의 푸념을 들으면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경에 보면 주인이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품꾼을 각각 불러서 일을 시켰다. 일이 끝난 오후 6시, 모든 품꾼들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

일찍 온 품꾼들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불평을 했다. 당연하다. 불평을 하는 품꾼들은 자신들은 일찍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 3시나 5시에 온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게 있다. 나는 채무자인가, 아니면 채권자인가? 답은 간단하다. 내가 빚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억울함과 원망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빚진 자라고 하면 모든 것에 감사와 감격이 있을 것이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는 모두가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 보니 받을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와 가족에게 많은 것을 해주며 희생당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과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했는데 멸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채권자 의식을 갖고 있다 보니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리가 없다. 자식들의 경우 부모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한다.

못해주기라도 하면 마치 빚쟁이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행패도 부린다. 채권자의 의식을 갖고 있는 자식들에게서 제대로 된 효(孝)가 나올 리 만무하다. 기업가는 내 리더십과 경영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종업원은 내가 죽어라 일을 하는 바람에 회사가 잘 되었고 그 바람에 회장만 호의호식한다고 불평을 한다. 모두가 채권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아름다움도 피울 수 없는 아주 나쁜 마음이다.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 보면 일상에 감사는 없고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로 메마름만 남게 된다.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의 유무에 달렸다.

우리는 돌이켜보면 만 가지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다. 즉 빚을 진 사람들이다. 무엇을 해도, 어떤 상황이 되어도 빚진 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면 감사와 감격이다. 사도바울도 말끝마다 ‘내가 빚진 자’라고 외쳤다.

우연하게 읽게 된 글이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형은 결혼을 해서 아내와 딸도 있었다. 방 두 개의 좁은 연립주택에서 어린 남동생과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남동생도 청년이 되면서 군대에 가게 되었다. 군 입대 전날 남동생은 형에게 10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편지를 전해주었다.

“형님 그동안 고마웠어, 힘든 내색하지 않고 부모님 대신으로 내게 따뜻함을 보여주고 이만큼이나 키워줘서 고마워, 어려운 살림 때문에 형님과 형수가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거든. 영장 받고 형님과 형수 생각하며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이야, 이번 여름에는 다른 곳에 쓰지 말고 꼭 형수와 조카와 바닷가에 한 번 다녀와”

그 편지를 읽은 형은 눈물지으며 말했다. “네게 제대로 해준 게 하나도 없는 데, 대학생이 되고, 학비 용돈은 네 스스로 벌어서 썼는데,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데” 정말 아름다운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 일까? 서로가 빚진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지우의 가정도 그렇다 모두가 빚진 자가 아닌 채권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 보니 보상만 받으려 한다. 그런 심리를 갖고 있으니 불화를 일으키고 이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은 가사 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아내는 남편이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가정은 화목하고 축복받는 귀한 가정이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덕(德)을 보았다고 생각하자. 서로에게 감사하며, 위로하고, 또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자.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예전에 부친께서 들려주시던 말씀 중에 천당과 지옥에서의 식사 장면이 생각난다.

천당과 지옥의 숟가락이 너무 길어 도저히 자기가 먹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천당의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먹여주지만 지옥은 서로가 자기 입에만 넣으려다 모두 흘리면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 베풀고 여유 있는 나눔의 마음, 빈손같이 자신을 비우는데 있다. 다툼과 분쟁은 지나친 이기심과 소유하고자 하는 과욕에서 오는 것이다. 빚진 자 되어 마음을 비우자. 서로에게 빚진 자가 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교직 생활을 끝내고 붓을 잡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대해 ‘한 평생 가족 위해 희생하신 분이시니 이제라도 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것을 하게 해드려야 한다.’며 말없이 내조하면서 그 어려운 살림을 혼자 이끌어 오신 어머니.

그분들을 통해 진정한 삶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또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어떤 기억과 추억을 남겨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 가정은 진리와 사랑의 바통을 이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구정 명절이 다가온다.

모처럼의 만남에서 서로를 수고했다고 위로하며 덕분에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인사하자. 빚진 자 되어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며 서로를 위로하고 감사하는 명절을 맞이하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 로마서 12 : 18 말씀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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