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날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달력을 보고 옷차림을 바꾼다. 기온과 관계없이 봄이 되면 외투를 벗어버리고 6월이 되면 여름옷을, 또 11월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 입는다.

유럽 서구인들처럼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우기에는 두툼한 옷을 입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으스스하게 떨면서도 홑 겹옷을 그대로 입는다. 집단주의 사회. 타인 지향적 사회가 낳은 웃어 버릴 수만은 없는 무개성한 생활 습성의 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도 이제는 낡은 언어가 되어버렸다. 요즘 신세대라 일컫는 젊은이들은 마치 서구인들처럼 계절, 기온과는 상관없이 개성 있는 옷차림을 보여주고 있다. 심하게는 너무 지나친 노출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리 우려할 문제는 아니다. 정작 문제는 옷차림이 아니라 화석처럼 경직되고, 외눈박이처럼 획일화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나라처럼 ‘민주’를 빙자한 자유를 내세우며 무법천지가 되고, 논쟁과 토론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나라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그렇다 쳐도 그런 정치적 장벽이 없는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쟁점마저 좀처럼 논쟁과 토론의 불꽃이 튀지 않고 다툼만 존재한다. 최근까지도 대통령을 두고 막말을 일삼는 저질 국회의원들과 갑 질 노릇을 단단히 하면서도 뻔뻔한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이 얼마나 뜨거운 논쟁거리였는가. 그러나 마치 하나의 형식적인 과정처럼 미적지근한 말만 오가더니 이제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운동경기처럼 승패를 확연히 판가름하려는 사회도 드물 것 같다.

자신의 의견이 승세를 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강해져 상대 측을 입도 벙끗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만약에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못할 경우 불법시위를 하면서 폭력을 휘두른다.

이 모든 것이 단세포적이고 획일적인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가 빚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달 14일 민주노총 등이 주도한 민중총궐기는 누가 뭐라 해도 법과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외국의 집회와는 달리 불법적인 집회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현행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 조계사에 잠입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정부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자진 출두하겠다며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기자회견까지도 하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등 불법 시위를 지휘하고 있다.

거기다가 조계사 일부 스님들이 그를 감싸주며 종교를 내세우면서 기(氣)를 세워줬다. 이것이 법치국가를 자처하는 국가가 맞는 것인지? 또 이를 두둔하는 정당은 우리나라의 정당인지 의심스럽다.

현행법 위반자가‘이런 정도의 실정법 위반’ 이란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경찰 출두의 전제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적반하장이다. 민주노총은 불법 시위, 폭력시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기가 차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시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주장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불법 폭력집회가 아니라 준법 집회에 부여된 권리이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나라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정권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향해 진격하라”라고 외치며 불법집회를 주도하는 등 마치 전쟁을 치르는 듯한 인상을 보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14일 불법집회로 인해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 113명이 부상을 입었고 한 의경은 눈이 실명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골절상을 입은 경찰관들도 부지기수다. 3억 9천만 원의 피해도 발생했다.

올 들어서만도 과격 불법시위로 경찰관 302명이 다쳤고 또 지난 5년간 불법 집회. 시위로 총 117조 원에 이르는 사회적 손실을 입었다. 오죽하면이라는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된다. 이들처럼 상습적으로 불법 집회를 주도하는 단체들의 집회. 시위의 자유는 제한을 해야 한다.

특히 집회에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복면 착용과 쇠 파이프, 각목 소지를 금지하고 이 같은 주도자들에게는 형사적 책임뿐만 아니라 민사상 손해배상책임까지도 물어야 한다. 이런 시위 문화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솜방망이 처벌과 준법의식이 확립되지 않고 정치인들이 눈치를 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속이 타들어간다. 국회선진화법 이전에는 ‘직권 상정’ ‘날치기’ 등으로 법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리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라 할지라도 할 수가 없다. 19대 국회에서도 여전히 선진화 법으로 인해 다수당인 여당이 쟁점 법안이 지연될 때마다 야당을 향해 원망을 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 말대로 선진화 법을 무기로 야당이 민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야당은 정권을 다시 잡겠다는 야망은 없는 것 같다. 집권을 했을 경우 자기들도 시련을 겪을 것을 알고 스스로가 선진화 법을 폐지하는 것에 동의를 해야 하는데,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물론 야당으로 있을 땐 재미도 볼 수 있다. 그 재미 맛에 빠져 정권 탈취도 잊었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여. 야가 선진화 법으로 인해 모두 정치적 상실의 좌절을 맛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국회 회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급해진 대통령도 국회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 쓴소리를 갖고 또 일부 정당이나 단체들이 입방아를 찧는다. 대학교수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자성 어를 발표했다.

올해는 ‘세상이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했다. 이와 함께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과 용군이 합쳐져 이뤄진 말로 각박해진 사회분위기의 책임을 군주, 다시 말해 지도자에게 묻는 말이라고도 했다.

그동안 교수신문은 법정 정치권의 잘못을 비판하는 사자성어를 주로 뽑았지만 이렇게 대통령을 대놓고 책임을 지적한 적은 없다. 지난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속임)였다.

위정자의 실덕을 꼬집는 독설을 드러내는 게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현실이다. 교수들의 말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고, 사슴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는데 일조를 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실’(失)을 말하거나 인정하지 않았고. 자성의 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교수들은 왜 박 대통령에게서 혼군을 떠 올리게 했을까. 아마도 온 국민이 제발 대통령이 사람 좀 만나라는 걱정스러운 세태 때문은 아닐는지, 전화와 문서로만 이루어지는 소통 부재의 방식을 바꾸어보라는 열망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벌써 한 해가 끝자락에 걸쳐 있다 2015년 달력도 이제 한 장 밖에 남아있지 않다. 나의 한 해는 과연 어떻게 지냈는가를 생각해보자.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 만족과 희열보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아무래도 클 것이다.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사회적 동물이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인간이다. 과연 올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공동체는 어땠을까. 자고로 현명한 군주는 인재를 얻는데 애쓰고, 멍청한 군주는 세를 불리는데 애쓴다고 했다.

군주가 세를 늘리기 위해 닦달을 하다보면 나라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요즘 TV에 심심치 않게 뜨는 게 있다. 총선에 출마하려는 예비 후보들이 자신의 능력을 알리기보다는 자신이 박심(朴心)과 얼마나 좋은 관계인지만 증명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친박계는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긴박한 민생 법안들이 어둠 속에 묻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위기를 느끼지 못한 채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 결국 그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지를 현명한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한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표로 심판을 해야 한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대통령이다. 법안을 심의조차 하지도 않고 있으니 대통령인들 어찌하겠는가.

올 한 해 내가 살고 있던 대한민국이란 나라 민주국가인 것은 맞아, 서울 시내에 즐비해 있는 노조원들의 투쟁, 계속해서 추락하는 국가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심정은 입술이 탈 정도다. 그런 마음은 필자만의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연하장을 받은 기분이 착잡하기만 하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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