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아주머니에게 막말과 욕을 한 여학생을 ‘패륜녀(悖倫女)’, 역시 나이 많은 아주머니에게 욕설을 해댄 남학생을 ‘패륜남’이라고 부르며 비판을 했던 기사가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흔히 윤리(倫理)라고 하면 고개를 먼저 젓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진부하다는 인상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사람이 지켜야 할 변치 않는 도리라는 것은 이 사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윤리라고도 부르고 윤상(倫常)이라고 일컫는다.

윤(倫)은 ‘무리’라는 뜻이 우선이다. 사람들이 섞여 사는 사회라는 함의(含意)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常)은 변치 않는 원칙이라는 뜻을 말한다. 흔히 경(經)과 상을 한데 섞어 경상(經常)이라고 적으면서 사람 사회에서 결코 변치 않는 원칙적인 도리를 지칭하기도 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윤상을 말하자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하는 원칙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윤상이 무너지고 지켜지지 않을 때 흔히 나오는 말이 ‘패륜’이다. ‘어긋나다, 어기다, 거스르다’는 뜻을 지닌 ‘패(悖)’가 앞에 붙는다. 조선의 실록(實錄)에는 이 패라는 글자가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패역무도(悖逆無道)’는 특히 왕궁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을 지칭한 말이라고 한다. ‘행패를 부리다’, ‘패악질을 하다’는 말도 자주 쓰인다. 모두 사회의 근간을 뒤엎으려는 무질서를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신유의(君臣有義)’는 맹자(孟子)가 다섯 가지 윤상, 즉 오륜(五倫)을 말하면서 임금과 신하의 원칙적인 자세로 내세운 ‘덕목’이다. 국민에게 신하(관료)는 의(義)를 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의라는 것은 제 직분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요즘 국감을 실시하는 국회를 보면 ‘패역무도’한 의원들 투성인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사태가 거칠어지면서 설화(舌禍)가 잇따르고 있다. 국감을 하는 것인지, 개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옛날 옛적 일까지 들춰내며 상대 당 헐뜯기에 급급하고 상대 당 공격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토론과 관용은 사라지고 이념대결과 일명 마녀사냥이 판치는 느낌을 준다. 의원들이 최소한 지켜야할 원칙마저 저버린 채 서로를 물고 뜯는다. 늘 되풀이 되어왔던 과거의 사안을 놓고 서로 거품을 물고 치고 받으며 싸운다. 죽은 대통령, 전직 대통령도 거론된다. 거친 말도 여과없이 쏟아낸다. 국회 회기 중 면책특권을 한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비단 국회의원들만 그럴까. 아니다. 다른 공직사회,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저번에도 이 같은 패륜적인 현상이 암세포처럼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도 이제는 ‘개인주의’도 모자라서 남에게 아픔을 줘도 ‘내 것’만 찾으려는 ‘이기주의’로 변해가면서 패륜아들이 지난해보다 더 증가 추세에 있어 ‘인간교육’의 절실함을 느낀다. 이러다간 겨우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마저 허물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NLL 기록 삭제’ ‘국정원 댓글사건’ ‘채동욱 친자 사건’ 등 어차피 정확한 판단은 ‘검찰’에 넘어간 상태다. 검찰에 넘긴 이상은 다른 곳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월권이고 시간낭비다. 아무리 국회라고 하지만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 등을 대놓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은 그나마 사법부를 믿을 수밖에 없다. 사법부의 권위를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아끼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여야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물고 뜯는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해답은 간단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비상식’으로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주제를 놓고도 생각이 서로 달라 ‘티격태격’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방법이 옳다고 우기고 버틴다. 제 3자가 보기엔 참으로 답답해 보이지만,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마는 폭력으로, 그것도 과거와 같은 집단적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는 ‘패륜아’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찌 보면 서로 다름은 나를 ‘다듬는 도구’다. 다름에서 오는 차이는 내 안에 숨겨진 이기심과 욕심을 하나 둘 깨뜨리며 모난 성품을 다듬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개성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면 축복으로 가는 소통의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난다. 너무도 불신의 벽이 두껍게 쌓여 있고 패역무도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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