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이 모자라면 군중의 노예가 되고 주관이 지나치면 망상(妄想)의 종(從)이 된다. 흔히 무식자는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유식하다는 지식인들의 억지도 그에 못지않게 센 것 같다. 요즘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과 관련, 여ㆍ야가 각기 다른 주장과 해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다. 이미 계륵(鷄勒)이 되어버린 ‘녹취록’ 으로 정계가 어수선하다.

노 전 대통령의 NLL대화록 파문은 지난 해 10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 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 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완전히 날조”라며 정 의원을 허위 사실 공표혐의로 고발했으나 지난 2월 서울 중앙 지검은 ‘정상회담 대화록의 발췌본과 원본 일부를 열람 대조 분석한 결과 정 의원의 발언이 기본적 취지에서 사실과 부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똑같은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해석은 전혀 상반된다. 언론을 보아도 그렇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노 전 대통령의 녹취록에서 발취한 내용을 여과 없이 사실대로 보도했지만 한겨레 등 일부 언론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 물 타기’ 라며 애써 사실을 부인하려는 듯한 비판 기사를 보도하며 여당을 맹공격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말 보다는 그것의 ‘해석’ 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거슬러 과거 10년 정부 때를 보아도 그렇다. 여야가 갈리는 듯 동일한 사안이면서도 언론도 바둑처럼 흑백논리가 분명했다. 이는 이념의 우상, 독선(獨善)의 도그마(Dogma)를 향한 잘못된 아집 때문이다.

지식인임을 자처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남쪽의 군사독재에 이를 갈며 저항했던 지식인, 교사, 학생들이 어찌된 까닭인지 북쪽의 선군(先軍) 독재에는 턱없이 너그럽고 말이 없다. ‘북침’이라고 비난 하던 6.25가 남침으로 밝혀진 이후 ‘통일전쟁’ 이라며 미화시킨 저들이다. 6.25 남침 60주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국적 전문가들이 참여한 민군 합동조사단이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을 배제할 만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천안함 격침이 북한의 테러임을 명백히 밝혔으나 당시 북한 관련 의혹을 ‘소설’ 이라고 비하하면서 자초, 충돌, 내부 폭발 등의 ‘판타지’를 쏟아내던 일부 정치인, 교사, 학생들이 도리어 정부와 국군을 매몰차게 비난하면서 빌미를 제공하고 안보무능에 대한 사과, 책임자 해임, 심지어는 군사재판 까지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정작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없다. 과거 10년 정부시절 ‘햇볕’을 쬐는 동안에도 북은 핵실험을 강행했지만 응징은 커녕 오히려 ‘일리가 있다’고 두둔까지 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정치인들을 보면 무슨 금기(禁忌)이거나 무오류(無誤謬)의 계율인양 북한 앞에서는 언제나 입을 달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일그러진 지식을 ‘진보’ 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위중(危重)한 안보 상황에서도 어떻게 북을 감싸며 두둔하려는 것이 남침 유도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게 놀랍다. 이제는 그 같은 자들이 국회까지 떳떳하게 진출했다. 지난 29일은 11년 전 제2 연평해전이 벌어져 우리 해군 6명이 전사한 날이다.

한일 월드컵 터키와의 3, 4위전이 열렸던 그 날 고 윤영하 소령 등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 승조원 6명이 서해 NLL을 기습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맞서 싸우다 모두 장렬한 전사를 했다. 지난 달 29일 해군은 평택2함대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갖고 여섯 용사의 넋을 기리며 유가족을 위로 했다. 5.18 광주 사태 기념일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5.18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김대중, 전두환의 정치인 싸움에 이용당해 억울하게 희생된 광주 시민들에게는 특히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기에 바빴다. 심지어는 정부 최고 고위층, 정당 대표까지도 참석을 한다.

그러나 정작 조국을 지키다 적(敵)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추도식에는 무심하게도 정치인들이 무관심하다.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진정으로 고인들에 대한 애도를 하는 건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인지 그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 말자. 또 5.18기념식 때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그렇다, 굳이 불허할 필요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제창이면 어떻고 합창이면 어떤 가.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특정 단체나 세력이 애국가를 대신해 부르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에서 하듯 모든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한 후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쓸데없는 데 너무 소모를 많이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6월 임시국회 회기에 여야가 고(故) 노 전 대통령의 NLL대화록 열람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염려가 된다. 물론 공개를 하고 사실을 밝히면 되겠지만 자칫 판도라 현상이 재연되지 않을까 해서다.

이미 고인이 된 분인데 사실이 들어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사실 여부만 확인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공개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역시 정치적으로 슬기롭게 처리 했으면 한다. 모처럼 여야가 합의는 했지만 아무래도 ‘오월동주’가 아니라 ‘동상이몽’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또 우리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거다. 공연히 끓어 부스럼은 만들지 말자.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해도 자기 잘못을 깨닫는 데는 어둡다” 중국 북송의 재상 ‘범충선공(笵忠宣公)’이 남긴 통찰이다. 특히 지식인, 정치인, 학생들에게는 새벽의 죽비(竹扉))소리 같은 채찍일 것이다. 6천년의 세월을 건너온 지혜가 천둥 같은 울림으로 우리 가슴을 때리지는 않는가.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자유할 수 있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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