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제주도 여행권을 상품으로 내걸고 퀴즈 문제를 낸 적이 있었다. 문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인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이용해서 간다, 또 어떤 사람은 기차를 탄다, 비행기를 탄다는 사람, 아예 헬리콥터를 전세 내어 간다 등등 여러 방법이 쏟아져 나왔다. 또 어떤 이는 아주 기가 막힐 정도의 기발한 방법론까지 제시하기도 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정작 1등에 당첨된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여행을 간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대를 형성한 이 말, 누구든 느낄 수는 있었지만 정작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짧게 느껴지지만 낯설고 싫은 사람과 함께 할 경우 엘리베이터 안의 수십 초간의 시간마저도 아주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마 이런 것을 보면 사랑에도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는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엮은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돌로 되어 있지만 그 돌은 쇠에 찍힌다. 그러나 돌을 찍을 수 있는 쇠는 불에 녹는다. 그런 불은 물 앞에서는 꼼짝을 하지 못한다. 물은 증발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지만 그 구름은 바람에 밀려 흘러가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는 위력을 가진 바람이 제일 센 것 같아 보였는데 이런 바람도 사람에게만은 절대로 이기지를 못한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고민으로 인해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지나친 탐욕으로, 걱정 근심에 쌓여 인생을 불행이라는 구렁텅이에 빠뜨려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래서 자제력을 잃고 걱정과 고민을 잠시라도 잊고 싶어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술이라는 것을 마시게 되고 때로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며 취하기도 한다.

그런 술은 마치 마취제와도 같아 취해있을 때는 몰라도 깰 때가 되면 속은 더욱 쓰리고 아프다. 특히 기분파의 경우 늘 계산을 상대보다 먼저 하다 보니 술이 깨고 나면 정말 지독한 속앓이를 하며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마력을 갖고 있는 술이지만 밀려오는 잠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은 없다. 결국 그 같은 잠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보면 가장 강한 것이 죽음의 세력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아주 강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랑인 것이다. 성경에도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했고 또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라.”는 약 광고물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는 사랑의 오염과 본질이 왜곡되는 등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 같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의 속성, 온전한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신이 낸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의 속성은 관심(concern)이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보았다.

그렇다. 사랑이 많으면 관심 또한 많아진다. 또 사랑이 적으면 관심도 자연히 적어진다. 사랑이 없으면 아예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된다. 이제는 미움의 선글라스를 벗고 사랑의 빛깔인 선글라스로 바꿔 써야 한다. 사랑은 관심과 함께 가는 것이다. 더 깊게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보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행동과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겉과 속이 다른 사과와 같은 사랑일 뿐이다. 온유한 사랑이 되려면 존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또 인격적으로 낮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높은 자세에서 교만함이 가득 찬 마음으로 주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거짓 사랑이다. 사랑은 책임(Responsibility)이다. 이는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이 인격인 동시에 사랑하는 이를 위한 배려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을 지지도 않을 것이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책임을 지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Understand)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즉, 상대방의 입장 아래로 내려서는 것이다. 끝으로 온전한 사랑이란 주는 것(Giving)으로 정리하고 싶다.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아낌없이 주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 같은 희생적인 사랑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자”는 성경 말씀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이 될 때 이 사회는 아름다운 세상,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어도 줄지도 않고 부도도 나지 않은 사랑, 모두가 베풀고 나눔의 삶을 사는 밝은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중국 ‘고사성어’에 견월망지(見月望指)라는 말이 있다. “달을 보라고 했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본다.”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을 보면서 떠오른 고사성어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를 따라가는 것은 목사를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들고 가기 때문에 그 등불을 따라가는 것이다. 목사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인도하는 주님을 따라 가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목사를 따라가다 보니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방황과 실망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和睦祭)로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신 그 사랑만큼 우리도 서로 그런 온전한 사랑을 나누는 가족의 마음이 되었으면 한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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