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상대가 파견한 간첩을 역으로 이용하는 반간(反間)이 있다. 그 대표적인 반간계는 삼국지에서 ‘주유’가 ‘조조’ 진영에서 파견한 ‘장간’이란 인물을 역으로 이용해 조조로 하여금 수전(水戰)에 능한 ‘채모’와 ‘장윤’ 등을 죽이게 한 유명한 고사가 있다.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은밀하게 만난 ‘장간’에게 ‘채모’와 ‘장윤’이 작성했다는 가짜 투항서를 보여줌으로서 상대의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자기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계책이다.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마침내 그 가짜 정보가 상대에게 흘러들어가 사실처럼 조작하는 건 사간(死間)이다. 이 역시 최종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유도하는 것이다.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는 1877년 이래 해마다 7~8월 두 달에 걸쳐 대대적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때가 되면 거리의 벽마다 건물의 창문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붙어져있고 곳곳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러나 그런 모차르트가 생전에 이 도시에서 겪은 것은 극도의 천대와 무관심이었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기간이기도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 반성하는 기간이라는 점이다. 이런 예수님도 모차르트처럼 그러하셨다.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냉대를 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것만 같다. 고향 사람들이 멸시를 하고 냉대를 했지만 결코 예수님이 부족한 성품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외눈만 갖고 있는 마을에 두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두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따돌림을 받을 수 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목수에 불과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를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주옥같은 말로 가르치거나 열정을 다해 가르쳐도 그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없을 때는 그 좋은 말도, 열정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우리는 살면서 한두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일은 우리의 삶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생각이나 욕심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다른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비극이요 슬픔이며 이 사회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병이다. 인간이란 천대와 멸시, 모함을 당해 보아야 거듭난 자가 되고 겸손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약해질 때 가장 인간다워지는가 보다.

흔히 이간질이란 것은 사실을 왜곡 편집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을 칭찬하는 말엔 인색하지만 남의 험담을 할 때는 신바람이 나서 넉넉함을 보이며 즐거워한다. ‘아니면 말고’식으로 상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특히 대상이 없는 자리에서 한 사람을 난도질하며 즐긴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약한 자신을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심리적 반응에서 오는 현상이다.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을 칭찬했을 때와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했을 때의 말 중 어떤 말이 더 기억에 남는지를 생각해보자. 아마 칭찬을 한 말보다 험담이나 나쁜 평가를 한 말이 더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모이면 남을 험담하고 음해하는 말로 타인을 나쁘게 평가하는 데 동조하며 쾌감을 느끼면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이간질은 이런 심리적 반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례로 B라는 사람이 A라는 사람과 A와 친숙한 C라는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기 위해서는 일부 사실에 자신이 꾸민 거짓말(A라는 사람이 당신-C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며 자극을 시킨다)을 혼합해 말을 옮기는 것이다. 또한 이간질을 시도한 B는 자신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C에게 아주 우호적인 시그널을 보내게 된다. 이는 물질적인 지원을 포함하여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의 진정성(인간성)이 의심받게 되면 결코 이간질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C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간질 하기는 더욱 쉽고 또 이런 사람이 쉽게 빠져든다. 이런 이간질로 인해 A에 대한 안티감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간질을 옆에서 동조하며 함께 호응하는데도 큰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일단은 이간질하는 사람의 말을 검증조차 하지도 않고 매도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대는 변명 한 번도 못해보고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간(間)’이라는 글자는 일반적으로 ‘사이’를 뜻하지만 동사로서 작용할 때는 남을 분열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화합을 이루지 못하도록 해 결국은 분열과 반목을 몰아가는 행위다.

얼마 전 일반인도 아닌 목사들의 모임에서 이 같은 사단이 발생했다. 이날 모임에 미처 참석치 못한 O목사를 B라는 목사가 요즘말로 완전히 씹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 자존심 강한 C목사에게 이간질까지 해 C목사가 O목사에게 폭언까지 하고 인간적인 모독을 했다. 정작 당사자인 O목사는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고 그들에게 굳이 나서서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만 자신이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마음이 안타깝고 가슴이 못내 아프다고 했다. 지금은 해명하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며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라며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 것이라고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O목사는 기자 출신으로 지금도 후배기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만큼 덕을 많이 베풀고 이해심이 많은 분이기도 하다. O목사를 보면서 좋은 생각을 갖고 칭찬을 하며 살아가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나쁜 생각 험담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며 살기에는 너무도 허무한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와 늘 함께하며 만남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을 과연 나는 얼마나 올바르게 알고 있는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누가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지 차제에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간질, 생각할수록 참으로 무섭다.

[시인.수필가.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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