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새해가 밝아왔다. ‘흑룡의 해’인 임진년(任辰年)이 어느덧 흘러가고 ‘뱀의 해’인 계사년(癸巳年)이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지난 한 해를 무사히 떠나보내고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의 아침에 대자연을 바라보며 살아있다는 자체가 참으로 대단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물론 지난 해, 좋은 일도 많았지만 고난의 시간도 있었다. 그래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만 하다.

“그래 정말 지난해는 참으로 어려움도 많고 고생도 많았지만 이렇게 다시 우리가 만날 수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서로 이렇게 덕담이라도 나누며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연말이 되면 예외 없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며 망년회(忘年會)를 갖는다.

요즘은 송년(送年)회로 바뀐 망년이란 단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2300여 년 전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자는 망년을 ‘세월을 잊고, 나이를 잊는다.’ 는 의미로 해석했다. 과거는 물론 아예 인생자체를 훌훌 털어버리자는 것이다. 대선이 낀 2012년은 무척이나 다사다난했던 해인 것 같다. 한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아도 그럴 테지만 우리 사회는 국내외적 여러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위기의 한 해였다.

이 격변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신년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드는 가장 큰 느낌이 있다면 무엇일까? 새 날을 맞이한 지금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행복과 성취감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절망과 패배감에 휩싸여 좌절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제 뜨고 지던 ‘해’와 ‘달’은 오늘도 똑같이 뜨고 지는데 이맘 때 쯤이면 많은 사람들은 지난해를 돌이켜보며 반성을 하기도 하고 새날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으며 새로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늘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함께 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지우(知友)로부터 새해 첫 날 전화가 왔다. 대뜸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며 “앞으로는 처가 식구들과는 언행을 조심하고 가볍게 보이지 않도록 처신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자신의 처세에 대해 후회하는 말을 했다.

사연인즉 엄격한 교육자, 공무원 집안에서 자란 지우는 사람들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을 허물없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장모와 처가 식구들에게 정(情)을 느끼며 가족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처가 역시 근엄한 분위기가 되다보니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말도 많이 하고 웃기는 소리도 곧잘 하면서 가족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다고 했다.(본인만의 생각!)

그런데 지난 해 망년회 때의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동서가 저녁을 안 먹는다고 했다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면서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 “그러니까 항상 말은 먼저 하는 게 아니지” 했는데 불쑥 장모가 “사실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은 둘째 사위야” 라는 말씀을 하면서 지우는 순간적으로 민망해진 마음에서 얼굴까지 붉어졌다는 것이다.

그 지우는 언론인 출신으로 시인이며 교수이자 목회자(목사)이기도 하다. 특히 기자 출신이라 눈치도 빠른 분이다. 또 자신이 웃기는 말을 할 때 막내동서가 맞장구를 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눈을 깜박거리는 거리는 것을 보면서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딴에는 삭막한 분위기를 재밌게 하려고 떠들었는데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재미있는 사람’보다 ‘가벼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부터는 처가 식구들에게 언행을 조심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도 줄이겠다는 신년 결심을 밝힌 것이다.

인생은 항상 밝고 즐거운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자신이 그런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그 자체가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이 세상은 오직 내 마음 같지는 않다는 것을 그 지우는 몰랐던 것이다. 관심을 기울였던 수고가 그래서 헛된 일, 실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를 뿐인데 자칫 그 말이 틀렸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아픈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60대 중반인 그 지우가 이번 망년회에서 충격이 큰 것 같지만 몇 마디 위로의 말로는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처가식구, 특히 장모에게 ‘좋은 사람’이 아닌 ‘가벼운 사람’으로 비춰졌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 같다. 한 해를 잊는다는 망년회가 그만 기억에 남는 나쁜 망년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하자면 “망년은 망년(忘年)이자 망년(望年)이 되어야 하는 거다. 가는 세월을 잊고, 자기를 잊는 것, 그래야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또 한마디 더 하자면 “기자, 교수, 목사라는 직업은 원래 말이 많은 것 아닌가. 그러니 말을 많이 할 수밖에” 힐링은 결코 남이 해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에 기대어 시간과 함께 스스로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그 치유의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올 한해도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남을 탓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가 치유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늘 긍정적 사고 속에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 지우의 ‘신년 결심’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었으면 한다. 새해 첫 날 밤새 내려 쌓인 눈을 서설(瑞雪)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하얀 눈을 밟으며 발자국을 남긴다. 이미 흘러간 2012년 한 해처럼 지워져 버릴 발자국.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계사년 한해의 날들은 또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이제까지 지내온 것처럼 무슨 일이 닥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웃으며 사는 것이 어쩜 올 한 해를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수필가.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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