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10여 년간의 드넓은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지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제1차 삼두 정치이래로 자웅을 가리던 폼페이우스에게는 가히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특히 삼두 정치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전선(기원전 53년)에서 사망한 이후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이 화려한 승전보로 끝났을 때, 과연 폼페이우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를 한번 상상해 보자.

그간 국내문제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로마의 근간을 흔드는 갈리아인의 반란이라는 지난한 국제문제로 서로간의 탐색전은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기나긴 갈리아 원정의 승리로 국제문제가 비 갠 후 맑은 하늘처럼 말끔히 해결되었을 때, 그들에게 더더욱 두드러지게 불거진 것은 그간 수면 하에 있던 국내문제였다.

갈리아 원정을 끝낸 카이사르에게 로마 원로원은 화려한 개선식이 아닌, 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품페이우스를 불신했으므로 그에게 각자의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포기하자고 제안했으며, 폼페이우스 측이 이 제안을 수락하자, 이번에는 원로원은 두 지도자에게 무장을 해제하도록 결의한다.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인 마르켈루스가 이 결정은 물론 모든 협상안마저도 거부하자, 원로원은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에게 최종적인 사임 명령을 내린다.

카이사르에게 이러한 명령은 자신의 정적에게 목숨을 내맡기라는 통보였다.

갈리아 원정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것은 개선장군에 대한 로마 시민의 추앙을 질시하는 무리들에 의해 단행되었던 것이다.

이런 명령이 떨어졌을 때, 과연 카이사르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명령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정적에게 순순히 내놓는 것이요, 명령을 거역하자니 로마에 대한 내전을 선언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평소에 보여준 신속한 판단과 굳센 의지로 주저없이 결정한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와 그의 관할 지역을 가르는 루비콘 강에서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외치며 로마로 진군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이후 <내란기>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기원전 47년)

이후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끈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를 쫓아 끈질긴 추격을 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검이 아닌, 뜻밖에도 암살자의 손에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이집트에 온 카이사르는 왕위 계승 싸움과 관련된 전쟁과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전과를 세운다.

이러한 전과는 로마 원로원에 보낸 전승보고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짧지만 명징한 언어로 전하고 있다.

<내란기> 이후의 이집트에서의 전투들은 카이사르의 종군 부하가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에 전해진다.

또한 <아프리카 전기>는 기원전 46년 4월에 유바 왕의 지원을 받은,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튀니지의 타프수스에서 소탕한 것을 카이사르 종군 부하가 기록한 것이고, 기원전 45년 3월에 히스파니아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과정을 종군 부하가 기록한 것이 <히스파니아 전기>이다.

이리하여 기원전 49년부터 벌어진 내란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브루투스여, 너마저!(기원전 44년)

이후 파격적인 개혁을 감행한 카이사르는 공화정에 충실했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주모자로 한 60여명에 의해 절명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믿었던 브루투스의 배신에 “브루투스여, 너마저!”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과 못 다한 야망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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