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잊으면 삶 마저 덩달아서 잊어진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뜬다면 삶이 제 값을 찾는다” 란 글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이 반드시 겪게 되고 피해 가거나 대신 할 수도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이런 죽음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때로는 몹시 비통해하며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죽음이란 단어를 잊고 산다.

굳이 종교적인 입장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이 세상에 죽지 않고 실체가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끝없는 생사의 교차점을 지나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흔히 사람들은 마지막 호흡을 거둘 때 비로소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바로 죽음이고 또 매일 밤 자리에서 잠에 빠져드는 것도 죽음일 수도 있다.

낮과 밤이 연속적으로 교체되듯 삶과 죽음 역시 경계가 따로 없이 교차하며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다만 우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해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 뿐이다.

온갖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2004년의 한 해가 저물어간다. 기대와 희망이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던 한 많은 갑신년이 닭띠해인 을유년에 밀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시간속으로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이맘때쯤이 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일상의 무상함을 느끼며 앙상한 가지에서 죽음이란 것을 한번은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런 날이 되면 왠지 모르게 휭하니 뚫린 가슴에 찬바람이 밀물 밀려오듯 살그머니 스며든다. 마지막 떨어지는 퇴색된 낙엽처럼 가슴에 피 멍이 든 것 같이 무척 아프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인가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까지 들며 한편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허탈감에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적시기도 한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그리고 또 다른 날의 태양이 떠오르듯 우리의 삶은 그렇게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한강물이 흘러가듯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암튼 필자에게는 참으로 기가 막힌 한 해였던 같다. 위선적인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세속에 물든 종교지도자들의 행태, 그런 기가 막히고 아픈 상처투성이의 한 해였지만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들리는 마지막 날 밤만큼은 저녁 식탁에 촛불을 켜놓고 싶다.

노랗고 따스하고 둥그렇고 환한 촛불이 켜진 식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붉은 빛 와인을 마시며 따뜻한 마음 모아 사랑과 희망을 나누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불안이 지속되고 힘있는 자들의 횡포로 지난해의 하루하루가 피멍투성이었을지라도 오직 내게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가정과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함을 만끽하리라. 그리고 묵은 해의 잘잘못과 아픈 상처들일랑 모두 제야의 종소리에 날려보내리라.

꽁꽁 얼어붙은 미움까지도 포근하고 따사한 마음으로 풀어야겠다. 그리고 용서받는 마음으로 밝은 새 해를 맞이하는 기도를 올려야겠다. 어쩜 기도는 하늘에 비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하늘의 소리가 들려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밝고 아름다운 새 해가 될 것을 확신한다.

욕심도 조건도 없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더 큰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제야의 불꽃. 그것은 하늘의 뜻이며 순하고 착한 우리 모두의 마음에 빛 일수도 있다.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닭띠의 을유년이 떠오른다. 그런 새 해 새 날을 위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촛불의 심지를 크게 밝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알리고 싶다.

그래서 이 땅에 진정한 죽음과 이별의 가치를 깨달아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은 거다. 어쩌면 성탄의 소식이 양치기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진 이유는 그들이 가장 낮고 험한 벌판에서 가장 늦은 시간까지 땀 흘려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성탄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설위원 안호원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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