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이 시를 읽으면서 어찌 보면 인간이란 질그릇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 같은 생각은 인간 자체가 나약하고 무가치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질그릇은 익히 알다시피 진흙으로 구워 만든 그릇으로서 유약을 바르지 않으면 윤기조차 없고 깨지기도 쉬운 그릇이다.

결국 질그릇 자체만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는 용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용기라 할지라도 그 안에 무엇이 담겨지고 사용 용도가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용기의 가치 기준이 달라질 수가 있다.

똑같이 인간이 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질그릇이라도 사용 용도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질그릇의 경우 밥이나 찬을 담을 수 있는 ‘식기’(俗)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질그릇은 제사 때나 의식행사에 쓰여지는 ‘제기’(聖)가 된다. 또한 어떤 질그릇은 ‘요강’ ‘재떨이’(賤)로 되면서 그 그릇의 가치 기준이 달라진다.

신이 창조한 우리 인간의 존재 가치 기준도 이런 질그릇 같이 무엇이 담기고, 또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식기와 같은 인생, 제기 같은 인생, 그리고 요강, 재떨이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식기나 제기가 아니라 요강, 재떨이 같은 인생이 되었을 때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지만 가장 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변변한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밑바닥에서 천대를 받으며 절망과 낙담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도 깨진 질그릇은 오히려 칼날이 되어 흉기로 변할 수도 있다. 그 같은 질그릇임에도 불구하고 그릇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기에 앞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금빛 나는 그릇이나 은빛 나는 그릇으로 과대포장을 하며 거짓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무지한 인생들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뻐기며 위선의 빛을 발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그 내면 깊숙이 더욱 더 공허함만 안겨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모두가 힘들어하며 심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고교 동창들과의 회식 자리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한 동창이 과거 공무원 생활을 잠시 했던 필자에게 지금까지 공무원 생활을 했더라면 국장이 되어 지금같이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지난 옛일이라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그 덕분에 30여회에 걸쳐 외국도 나가보고 학위도 받고 하버드대학까지 연수를 갔다 오지 않았느냐며 자위적인 답변을 한 적이 있었다.

순간 내가 어떤 형태의 질그릇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꼼꼼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행히 ‘재떨이’ 나 ‘요강’ 같은 질그릇은 되지는 않았던 같다. 그렇다고 ‘제기’가 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식기’로서의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결국 어떤 것이 참다운 성공의 삶인지는 몰라도 난 지금의 내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연약한 질그릇으로 살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살면서 환난과 근심 걱정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난 차라리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며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지 2004년째 되는 성탄절이다. 모쪼록 믿음이 있든 없든 간에 올 성탄절에는 예수 탄생의 축하에 앞서 우리 모두 아기 예수가 무슨 연유로 이 험한 속세에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의 연약함은 곧 복음의 능력이 완전하게 나타나는 질그릇이다. 과연 올 한해는 내 자신이 어떤 형태의 질그릇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고 신년 새해에는 또 어떤 질그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제발이지 유약을 바르지 않아 윤기는 나지 않을지언정 깨진 질그릇이나 ‘요강’ ‘재떨이’ 같은 그런 삶을 사는 우리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논설위원 안호원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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