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에 결혼, 40대 중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험난한 육아전쟁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직장 맘이자 고령엄마의 눈물겨운 분투기. 매주 금요일 문윤희 기자의 생생한 체험담으로 찾아옵니다.<편집자 주> 

결혼과 아기

내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을 채우며 달리고 있었던 서른여섯의 봄.
무슨 계기였는지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연애를 해야 겠다는 다짐을 불현듯 했다. 그동안 "왜 남자를 만나지 않느냐"며 노골적으로 사생활을 캐묻던 주변인들의 지나친 걱정과 내 우울한 미래에 뭔가 스스로 선물을 해보고자 했던 마음이 컸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소개팅 받습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서른 중반의 여성. 일과 술, 사람을 좋아해서 '결혼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던 내가 '남자'를 만나겠다는 선언을 하자 소개팅 주선은 의외로 적잖게 들어왔다. 나이가 서른여섯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나는 놀랍게도 점잔을 빼거나 소개팅 대상의 정보를 재고 말 것도 없이 소개팅 자리에 나섰다. 

남편은 세 번째 소개팅에 나온 남자였는데, 만나기로 할 때 마다 내게 일이 생겨 두 번이나 약속 일정이 미뤄졌었다. 세 번째 만남이 있던 날도 지방에 있는 제약사 공장 견학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맙소사 기자들을 태우고 달리던 버스 타이어가 터지면서 약속을 또 미뤄야 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사람과 나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기 마련. 전화를 걸어 약속 취소를 말하려 했다. "오늘도 일이 있어 못 뵐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서른아홉에 결혼했다. 내 결혼의 전제조건은 "당신 닮은 아이기를 낳아 기르고 싶다"였는데 그는 이런 나의 결혼 조건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둘이 충분히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아이'는 부담스럽다는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우리는 아이를 갖기 위해 자연적인 방법, 인공적인 방법 등을 알아보며 신혼생활을 이어나갔다. 결혼 2년차가 되어가며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지인들이 하나 둘 임신 사실을 알려오자 나는 좌절하기 시작했다.

늙은 내 몸과 늦은 결혼을 후회하며 임신한 지인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정신도 점차 피폐해져갔다. 결혼 전에는 일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어도 행복했는데, 아이 소식이 늦어지자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나를 에워쌌다. 첫번째 시험관 결과를 기다리던 때는 공교롭게도 취재원의 고소건이 겹치며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시험관 첫번째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때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첫번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10년을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북적북적한 서울을 떠나 남편 직장이 있는 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몸과 마음을 쉬면서 아이를 갖기로 해보았다. 낮에는 운동, 저녁엔 집안 정리와 식사 준비를 하며 남편이 오길 기다리는 평법한 주부 생활을 했다. 나름 편안하게 지낸다고 생각했지만 아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조바심에 내가 다시 시험관시술을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는 현실의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시술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닥쳤다.

"이렇게 된 거, 일하면서 해보지 뭐"

나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집은 여전히 수원이어서 서울까지 한 시간이 넘는 통근 거리를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내가 선택한 난임 전문의가 강남에서 서울역으로 병원을 옮기면서 이동거리는 더 늘어났다. 변화된 상황을 감내하면서 2년 동안 세 번의 시험관 시술이 더해졌고, 나는 결혼 6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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