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임미리 교수가 경향신문에 쓴 ‘민주당만 빼고’ 란 칼럼 제목이 장안에 화제꺼리로 확산되면서 향후 유권자의 심판에 따라 총선의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심판은 세 가지다. 신(神)의 심판, 법(法)의 심판, 그리고 평범하게 부여된 권리로 유권자인 국민이 행사하는 투표(投票)심판이다. 신의 심판이야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그 경지를 가늠하기 어렵고, 법의 심판 역시 갈수록 정치권력에 오염되어 믿음을 잃고 있어 기대를 가질 수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집권당이 ‘민주당만 빼고’ 찍자는 한 교수의 칼럼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노발대발한 것을 보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질주(疾走)하던 집권 여당 역시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의 심판이 가장 두렵고,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민주당은 이 교수의 글도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검찰에 고발했다. 고발의 칼날을 휘두른 집권당의 간판에는 ‘민주’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고발을 그냥 한 번 해본 것은 아니리라. 권력의 계획이 다 있을 것이다. 국민 계몽의 역설적 효과를 노린 것이다. 임 교수에 대한 고발을 통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언론과 지식인들의 손과 입에 재갈을 채우고 물리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군부 정권과 권위주의 정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을 자칭 촛불정권이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으니 권력의 사유화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절대지지 세력인 참여연대와 민변에서 조차 고소 취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을까. 임 교수의 칼럼이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음해했기 때문에 선거법에 위반된다는 민주당의 주장은 그만큼 설득력을 잃었다. 민주당은 지금까지 언론사와 정당, 개인 등을 상대로 수십 건의 고소. 고발을 제기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히 블랙코미디라 할 만하다. 마치 코믹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가 성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음흉한 집권당이 설마 그걸 몰랐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의도가 있다. 언론표현의 자유와 개인피해의 구제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근본적 가치다.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은 표현의 자유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받고 있다. 헌법 21조는 “모든 국민은 어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검열이나 처벌을 못하게 했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나신(裸身)합성 사진을 들고 국회의사당 안에 서 희죽이던 민주당 ‘표 모 의원’에 대해 야당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지자 여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묵살했다. 이런 헌법 정신을 감안할 때 민주당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칼럼을 쓴 임 교수와 칼럼을 게재한 해당 신문사 담당자를 고발 한 것은 반(反)민주적 폭거나 다름없다. 외부는 물론 당에서 조차 비판 여론이 일자 이에 움찔한 민주당이 고발을 취소했다. 그러나 진정성이 보이질 않았다. 고발을 취소하면서도 “그 교수가 특정정치인(안철수)을 위해 일한 경력이 있다” “민주당을 음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 며 고질적인 특유의 습관으로 ‘남 탓’을 이어가고 있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고발에 따른 사회적 논란이 일어난 데 대한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다. 당연히 당 대표인 이해찬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마땅함에도 당 대표는 지금까지 언급이 없다. 과연 이 같은 그릇된 정신을 갖고 있는 이들이 집권당이자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는 공당(公黨)으로서의 역할을 할 의지가 있는 것인지 자못 의심스럽기만 하다.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할 때 서로 간 훼손 없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만들어 놓은 제도가 대화와 중재라는 선행 절차다. 중재가 실패 한 뒤 그 때 가서 검찰이나 경찰 같은 형사사법기관에 고소. 고발하라는 게 법 정신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확립한 오랜 전통이자 원칙이다. 집권 여당은 이 같은 표현의 자유니, 헌법정신이니, 전통과 원칙이니 하는 것들이 매우 거추장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일까. 자기들한테 불편하거나 비판적인 여론이 일면 삼시 세끼 밥 찾아먹듯 검찰이나 경찰부터 찾는다. 언론의 표현의 자유문제에 이렇게까지 겁박하는 집권당은 과거 역대 정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집권당이 누구에겐가, 무엇인가에 쫒기고 있는 듯싶다.

지난 3년여 문 정권은 뭔가에 홀린 듯 급진주의(사회주의)적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강요하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지혜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전방부대 철수, 방호벽철거, 비행구역 축소, 특목. 자사고 폐지. 강남 아파트 때려잡기, 후세의 세대가 빚을 갚아야 할 과도한 복지. 연금. 사병 봉급 인상, 노조에 굴복,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분배). 주 52시간제, 정규직 확대. 생산성 없는 공무원 증원. 멀쩡한 원전 폐기하고, 태양광 사업. 반(反) 미. 반(反)일 감정 선동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균열 현상을 보이면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권력이 마음대로 인간과 사회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자체가 급진주의. 전체주의적이다.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정부가 박탈한다면 그 사회의 숨결은 결코 유지 될 수 없다. 미국 독립운동 사상가였던 로아노크의 하원의원 존 랜돌프의 말대로 “신의 섭리는 늘 천천히 움직이지만, 악마는 언제나 서두를 뿐”이다.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험악하게 사회를 망가뜨리는 이들이다. 이들의 집단이 바로 현 정권이다. 권력의 부패와 억압, 거짓 속성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보다 문재인 정권이 더 심하다는 얘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권력은 이 사회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견제 받고 감시를 당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권력은 모든 하위 권력들을 무릎 끓게 만드는 고약한 성질이 있다.

그런 권력에 맞선 개인의 최종적 무기는 말과 글의 자유다. 말과 글의 자유를 빼앗기면 개인은 집단 권력의 노예가 될 것이 자명하다. 이것이 개인의 인권과 함께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이유다. 한 때 인권과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는 민주당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 집단으로 추락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아쉽다. 아마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해 초심을 잃은 것 같다.

현 집권당은 권력 유지와 장기 집권에 집착한 나머지 법치도, 평등도, 공정도 모두 잃었다. 문 정권 사람들에게 당나라 문인 유종원의 작품 ‘영주 땅에 사는 어떤 이의 쥐’(영모씨지서. 永某氏之鼠)라는 우화를 들려주고 싶다. ‘옛날 영주에 미신을 믿는 모씨가 쥐띠로 태어나 쥐를 애틋하게 아꼈다.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고, 하인에게 쥐를 못 잡게 했다. 겁이 사라진 온 동네 쥐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심지어 음식을 바닥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되었다. 몇 년 뒤 모씨가 따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 주인이 왔다. 그러나 쥐들은 예와 같았다. 새로 온 주인은 “쥐는 음습하고, 나쁜 동물로서 도적질과 포악함이 심한데 어찌하여 이지경이 되었느냐?” 며 고양이 대여섯 마리를 빌려와 쥐들을 소탕했다. 임강(臨江)의 사슴, 검땅의 나귀와 함께 ‘세 가지 경계’로 알려진 우화다. 주제넘게 날뛰면 낭패를 당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죽기에 앞서 살길이 막막해지면 궁지에 몰린 쥐가 살쾡이를 무는 법”이라는 성어 궁서교리((窮鼠嚙狸))도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얼마 전 “쥐새끼가 짹짹거린다고 고양이가 물러서는 법은 없다.” 며 미국을 겁박하기도 했다. 경자 년 황금 쥐의 새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쥐의 신세로 전락한 것 같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문 정권이 출범할 때의 초심을 되살려 오만과 강압보다 국민(광화문)과의 소통과 화합에 좀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반대자의 말도 듣겠다는 공약을 지켜줄 것을 촉구한다.

 “문재인 대통령님 이젠 그만 내려오세요.” 광화문 이승만 광장에서 들려오는 국민의 외침이 안 들리나요? “5공 시절보다 더 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는 나라에서 숨 막혀 살 수가 없다”는 한 네티즌의 글에 수많은 공감의 댓글과 호응이 이어지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 청와대와 집권 여당은 알았으면 한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임 교수의 호소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더니 권력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나라가 급진주의,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게 국민이 막아 달라는 양심의 절규였다.

권력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위세가 당당했던 정치권력이 ‘한 줌의 권력’으로 몰락하는 것을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는가. 혼돈의 한가운데, 이제 주인인 유권자들이 나라의 길을 ‘표’의 심판으로 다시 명령을 해야 한다. 혹독한 심판대로 올라설 후보들, 학연. 지연 모두 버리되 이번 만큼은 00정당은 빼고, ‘정당’(政黨)을 보고 찍자.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인.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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