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신임총독에게 애국의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인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가 의거 100주년을 맞아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대한한의사협회는 6일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며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보건의료계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의사가 역할과 영역에서 제한 없이 포괄적 의사로서 본연의 모습 찾을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강우규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으며, 뛰어난 의술로 30대  초반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후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09년에 단천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선생을 만나 55세의 나이에 민족의식에 눈을 뜬 인물로 소개된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신흥동(길림성 요하현)에서 만세운동 주도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 강우규 의사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길림성 요하현 지부장을 역임하며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가 새로운 총독을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총독 처단을 결심한다.

러시아인에게서 구입한 폭탄을 지닌 채 원산을 거쳐 서울로 잠입한 강우규 의사는 9월 2일, 서울역에서 신임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37명의 일제 앞잡이들을 살상하고 아쉽게도 총독 피살에는 실패하고 만다.

일제에 의해 체포된 강우규 의사는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충절이 담긴 유언을 남기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강우규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비록 신임총독은 폭살시키지 못했으나, 강우규 의사의 이 날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만행과 강압통치에 처음으로 의열 항거로 맞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훗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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