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중하고 급해도 앞뒤 잴 것이 있는 법이다. 설령 의도가 좋다 해도 핵심적인 대목에서 순서가 바뀌면 여지없이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요즘 남북문제를 다루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잠시 잊고 자만에 빠져있는 것 같다.

특히 문 대통령의 하는 말들을 듣다 보면 ‘노안비슬’(奴顔婢膝)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조아린 사내종의 얼굴과 계집종이 무릎을 꿇듯이 남과 교제(交際)할 때 지나치게 굽실굽실하며 비굴(卑屈)한 태도로 일관함을 이루는 말로서 대통령의 처신이 그렇게 비춰진다.

김정은이를 비롯해 북한의 수뇌들이 장관들에까지 ‘갑 질’노릇을 하는데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을’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에 얻어먹으면서도 당당하고, 주면서도 비굴한 관계로 이어진다면 조폭과 유흥업소의 관계일 것이다. 지금 남과 북의 관계가 이와 흡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북한이 갑질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가 자처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이 같은 풍조가 만연해진 것은 대통령의 언행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에서는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이의 대변인이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인데도, 무슨 까닭인지 대통령부터 부처 장관들까지 북한에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청와대와 정부가 이 모양이니 일반 국민들도 ‘전쟁 없는 평화’라는 말에 도취되어, 적반하장으로 문 정권을 지적하는 야당을 질타하며 북한에 대한 경계가 해이해지고 있을 정도다.

문 대통령이 미국과 유엔에 던진 메시지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한을 믿어달라는 호소였다. 문 대통령은 “속임수를 쓰거나 시간 끌기를 하면 미국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김정은이의 말까지 전하며 김정은을 감싸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 신속한 종전 선언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여전히 ‘종전선언’을 서두르고 있다. 하나의 정치적 선언임을 거듭 강조하며 년 내에 종식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떡 줄 사람은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형국’이다. 말로는 미국과의 관계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며, 낙관하는 모습이다.

마치 트럼프가 북한과의 활발한 교류를 양해 한 것처럼 말하지만 외신에 따르면 정 반대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은 그 어느 때보다 대북제재를 완전하게 이용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제재를 늦출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다.

이들뿐만 아니다. 유엔 안보리 회의에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유시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모두 대북제재를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각국 대통령을 만나보지만 모두 형식적이고 원론적인 대화만 나눴을 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접도 변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 문 대통령이 종전 선언을 서두르며 쏟아낸 말의 성찬(盛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선언’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진정한 종전을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북한에 억류된 대한민국 국민들의 송환과 6.25 납북자, 국군 포로, 납북어부, KAL기 승무원, 김동식 목사를 비롯한 모든 납북자들의 생사확인과 유해송환,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상봉 문제를 매듭져야 한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종전을 할 경우 포로와 억류된 민간인을 모두 석방토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종전을 원한다면 70여 년 동안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납북자들과 지난 5년 동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을 송환하라고 김정은에게 강력히 요구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민 3명을 송환하는 데 성공하고 기내에까지 올라가 이들을 환영했다. 일본도 마찬가지, 회담을 할 때마다 납북자 송환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무엇이 무서워 세 번씩이나 만나면서 억류된 우리 국민을 송환하라는 말을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조치도 못 하면서 종전선언을 강조하는 건 한마디로 ‘대북 굴종’이다.

무엇이 두려워 한마디도 못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6.25 때 북한으로 억울하게 끌려간 우리 ‘납북자들’을 김정은이가 싫어하는 단어라며 신경민 등 일부 여당의원들이 ‘실종자’로 바꾸자고 해서 우리 납북자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불안한 구석 때문에 합리적 의심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또 그래야 한다.

특히 온 국민의 사활이 걸린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중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 대통령이 이번 순방을 통해 빠른 종전 선언을 요구하지만 미국 측이 외면하는 것은 북한이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핵. 미사일 리스트나 비핵화 일정이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이와 함께 탈북민 강제 북송, 탈북여성 인신매매 정치범 수용소, 종교탄압, 공개처형, 고문 구타 등 북한주민에게 대한 인권이 무시되고 있는 북한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단독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정은의 방북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도무지 북한에 대해 그토록 감싸려고만 하는 지 납득이 안 간다. 문 대통령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를 보면서 새삼 와 닿는 게 있다.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부친이 물려준 오사카성(大阪 城)을 본진으로 삼아 세습정치를 꿈꾸었다.

오사카 성은 바다와 강으로 둘러 쌓여있는데다 2중 깊이의 해자를 갖고 있어 문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점령하기 위한 계략으로 특사를 파견했다. “이제 전쟁을 그만하고 평화롭게 지내자”며 종전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계속된 전쟁에 신물이 난 히데요시가 솔깃해 이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이에 도쿠가와는 한 술 더 떠 ‘우리가 서로 화친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2중으로 된 해자도 메워서 백성들에게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도래했음을 입증하자’고 제안하자 그 제안까지 받아들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병력이 총동원되어 해자를 메워주는 공사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쿠가와의 계략이었다.

완공되면서 도쿠가와는 단숨에 오사카 성을 함락시켰다. 패망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모친과 함께 자살을 택했고, 가족들은 모두 처단되었으며,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후일 화친 조약을 어겼다는 비난이 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상에 적장의 말을 대책 없이 무조건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는가.

적장의 말을 대책도 없이 그대로 믿는 바보는 죽거나 멸문을 당해도 싸다.”고 했다.

지금이 그런 위기다. 유엔 회원국인 한국은 안보리 결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양해도 없이 독단적으로 문 대통령이 시기와 절차를 무시하고 종전선언을 밀어붙이며 남북철도연결 사업이 이어질 경우, 명백한 제재 위반이다.

국제적인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칫 월남처럼 패망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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