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식과 친모를 교통사고로 다치게 하거나, 억대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나 남편 명의로 보험을 들어놓고 살해하거나, 수억대의 재산을 탐하고 부모나 자식을 죽이는 행위, 오랜 시간 독소를 건강식품인 양 먹여 자연사(死)한 것처럼 위장하거나, 배신한 연인을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이권 다툼으로 상대를 살해하거나,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둘러 살해하거나 하는 내용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화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뻔뻔하다는 것이다. 재물을 탐하기 위해 인간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동요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뉴스와 드라마를 통해 그런 사건을 접하면서 과연 인간으로서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 때가 많다.

학창시절 ‘성선설’((the theory that man's inborn nature is good)과 성악설(the ethical view that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evil)을 놓고 논쟁을 벌리던 때가 생각난다.

우선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 할 수 있는데, 맹자와 순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은 정반대다.

맹자는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게 태어났다고 하고, 순자는 그와 반대로 사람은 악하게 태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맹자의 시각을 성선설, 순자의 시각을 성악설이라고 부른다.

매우 대립적으로 보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뿐이지 본성을 논하는 근본적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인간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결국 악함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 악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교육과 자기수행이 필요함을 다름이 있지 않다며 무선악설(無善惡設)을 주장하는 고자(告子)도 있다.

고자는 맹자와 순자와는 달리 사람의 본성이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마치 물이 동서를 구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길을 어떻게 터느냐에 따라 물이 움직이는 속성을 보고 사람의 마음도 선과 악 중의 하나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과 교육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고 보았다.

맹자(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았고, 순자는 악하게 보았으며 고자(告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본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에서는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환경에 따라 악해짐으로 인성을 계속 가다듬으며 본성이 악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며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은 원래 악하게 태어나 예의를 함양해야 하는 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창한다.

고자 역시 "인간의 본성이란 마치 여울물과 같다”며 ‘이것을 동쪽으로 길을 터놓으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물길을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문득문득 터져 나오는 인간에 대한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로 정의하려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오래전에 공자•맹자•주자 등은 인간의 성품은 선하다고 결론은 내리며, 『4서6경』의 진리를 설명하였고, 또 그런 기준으로 경학에 대한 학설을 세워 놓았다.

조선 최고의 경학자 다산 또한 많은 논리를 전개하였지만 결론은 공자. 맹자의 주장처럼 인간의 성품은 본디 착하다는 성선설에 확고한 믿음을 지녔었다.

당나라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공맹의 유학이 정주(程朱)의 성리학으로 윤색되면서, 본연(本然)이니, 무시(無始)니, 순선(純善)이니 라고 말하지만 ‘다산은 그런 성리학적 논리에는 철저하게 거부하면서도 하늘에서 받은 착한 성품대로 어김없이 따라가면 도(道)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성은 선하다는 학문적 결론을 얻어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집중본)이라는 자신의 일대기를 통해 자신이 얻어낸 경학연구의 결론을 요령 있게 설명한 바가 있다.

“마음의 허령(虛靈)함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본연(本然)이니, 무시(無始), 순선(純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의 기능을 생각함에 있어서 ‘도리어 미발(未發) 이전의 기상을 살핀다.’라고 해서는 치심(治心)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것은 재(才)이며,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쉬운 것은 세(勢)이며, 선을 즐겨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성(性)이니, 이 성을 따라 어김이 없으면 도(道)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은 선하다는 것이다.(心之虛靈 受之於天 不敢曰本然 不敢曰無始 不敢曰純善 心之官思 反觀未發前氣象 非所以治心也 可善可惡者 才也 難善易惡者 勢也 樂善恥惡者 性也 率此性而無違 可以適道 故曰性善也)” 모두가 그럴만한 학설이다.

정리를 하자면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나 결국은 환경과 교육에서 설정되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인간의 한 단면만을 갖고 선. 악을 평가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다.

결국은 인간은 선과 악을 갖고 있으면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선하거나 악해질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여러 학자들이 여러 학설이 난무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순자의 성악설 보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믿고 싶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우리 인간이 '악한 죄인'으로 태어나 예수의 구원으로 거듭난다는  기독교 원리에는 맞지 않지만  태초에 인간의 본성은 ‘선’했으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악’해졌다고 믿고 싶은 거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참회의 눈물이 있다는 것으로 입증하고 싶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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