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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이야기(70)
인조임금과 양잠
2017년 02월 08일 (수) 15:50:19 편집부 news@pharmstoday.com
윤재수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인조임금은 선조 28(1595)년에 탄생하였고 인조 27(1649)년 몰하였다. 조선 16대 임금으로 제위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하셨다.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휘(諱)는 종(倧)이고 자는 화백(和伯)이며 호는 송창(松窓)이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광해군의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로 설정하여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광해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 남인의 사림(士林)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鄭曄), 오윤겸(吳允謙), 이정구(李廷龜), 김상헌(金尙憲)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李元翼),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등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奇自獻), 유몽인(柳夢寅) 등의 역모가 있었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黃玹), 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다.

금나라 군사가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침입하여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양국의 대표가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그러나 결국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金集),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왜란, 내란 및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 농민경제, 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행하였다. 요역과 공물(供物)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1623년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稅源)을 확대했다.

한편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했다.

인조실록 19권, 인조 6(1628)년 9월 30일 정해(丁亥) 4 번째 기사에는 전 만호 감경인(甘景仁)이 상소하여 민심을 바르게 하고, 재해에 대비하고, 부역을 관대히 하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무비(武備)를 닦고, 속오(束伍)를 분명히 하고, 기예를 힘써 익히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 8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비국에 내려 행할 만한 일을 채용하게 하는 동시에 그를 상당한 직책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인조 7(1629)년 5월 6일에는 이귀가 아뢰기를, "농업과 잠업은 나라의 대본이므로 잠시라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 뽕밭으로는 율도(栗島)보다 잘 되는 데가 없는데 지금은 전혀 뽕나무를 심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사부(士夫)들이 값을 주었다고 하면서 그 토지를 점유하여 사전(私田)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명년 봄부터는 뽕나무를 많이 심고 경작을 못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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