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랜시스는 성자(聖者)의 칭호를 받은 분이시다. 그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모를 잘 만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아왔다. 어느 날인가 그는 거리에서 한센 병(문둥병)을 앓고 있는 한 걸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누더기를 걸친 몸에서는 코를 막을 정도로 악취가 진동했다. 그때 마음속에 강한 동정심이 생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걸인에게 다가가서 걸인을 끌어안아주었다.

그 순간, 프랜시스는 자신의 품에 안긴 사람이 걸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후부터 프랜시스는 약자(弱者)와 빈자(貧者)들을 위해 자신의 재물과 옷을 모두 나눠주는 기부자가 되었다.

“우리의 옷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벗어주자.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우리가 잠시 빌려 입은 것뿐이다.” 프랜시스를 따르는 수행자가 그의 이 같은 선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주인님, 우리가 너무 헐벗으면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도한 우리의 사역에도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적당하게 베푸시죠.” 그러자 프랜시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부유한 ‘절도 자’가 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가난한 제자’ 가 되고 싶다. 가난한 이웃 사람을 돕지 않은 것은 명백한 절도에 해당한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약수(藥水)는 계속 퍼내도 마르지 않고 늘 샘물이 솟아오르지만, 퍼내지 않고 그대로 고여만 있다면, 그 샘물은 낙엽이나 여러 부유물과 함께 썩어가기 마련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야훼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 말한다.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었다. 그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라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이 덜 가진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할 때 모두가 부족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년 말이 되면 예외 없이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십시일반으로 사랑을 듬뿍 담아 불우이웃 돕기 행사에 자발적으로 동참을 한다.

이런 섬김과 나눔을 통해 국민 모두가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국민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모금을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기초 생활 보장수급자가 135만 7000명에 이르고 차 상위 계층도 수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경제적 궁핍에서 허덕이는 사람이 많은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많이 창출함으로써 저소득층의 생활을 돕고, 효율적인 복지정책으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물론 ‘가난은 나라 임금도 못 막는다.’라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불우한 이웃들을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해 보인다.

가득이나 경제 불황으로 국민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데, 촛불시위 등 정치권의 정쟁(政爭)까지 겹치면서 국민들이 추운 겨울을 더 움츠려들게 하고 있다. 이제는 캐럴송도 들을 수 없는 조용한 거리가 되었지만 성탄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사람들에게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하나같이 그들은 ‘성탄절이란 먹을 것 많고, 팔자 좋은 사람들이 즐기는 날이지,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위해 매일 죽도록 일하는 사람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날’이라고 말한다.

그들 말대로 흔히 성탄절은 성탄 카드나, 메일, 카톡, 페이스북 등으로 멋있는 크리스마스 그림엽서를 보내며, 선물을 주고받고, 맛있는 외식과 분위기 좋은 파티로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성탄절의 의미가 크게 잘못 전달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탄절의 의미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인 인간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자신을 대속 물로 바치기 위한 목적이 있어서다.

대속 물은 바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셨고 그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이다.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병신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24일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이다.

아기 예수는 왕궁이나 고급 주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성탄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더더욱 아니다. 오직 주인공은 아기 예수다.

그래서 성탄절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린 예수가 홀로 빛나야 하는 귀하고 복된 날이 되어야 한다. 그런 예수는 우리에게 섬김과 나눔, 그리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성탄절의 의미를 안다면 그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닮자. 소외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웃을 위해 우리 모두, 도심에서 촛불시위를 하든 말든 동요되지 말고, 예수를 닮은 사랑의 불을 지펴보자.

한 해를 보내는 시간, 덜 후회하는 마음으로 저무는 마지막 한 해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장식해보자.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나눔뿐이다. 사랑의 언어로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뿐이다. 결코 커서도 아니고, 부유해서가 아니다.

그들 속에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세상이 어수선하지만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사랑을 나누며 그분의 삶을 닮은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해보자.

그래서 금년 연말도 훈훈하고 따뜻한 마음이 이웃에게 전달되며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문득 안도현의 ‘나에게 묻는다.’라는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단 한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아시시의 프랜시스 성자(聖者)처럼 뜨거운 사람으로 기억되어는 우리가 되어보자.

[시인. 칼럼니스트. 한국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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