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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에 누름돌 하나씩 갖는다면
2016년 12월 08일 (목) 13:15:19 안호원

어릴 적 어머니가 냇가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씩 주워 다 장독대 옆에 가지런히 갖다 놓으시던 기억이 난다. 그 돌은 모나지 않으면서도 반들반들하다.

그렇게 갖다 놓은 돌을 김치가 수북한 독 항아리에 속에 넣으면 그 무게로 숨을 죽여 김치 맛이 나게 해주는 돌이다.

일명 누름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돌이다. 처음에는 그 돌을 주워 오시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몰랐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돌의 용도를 알게 되면서 간혹 냇가를 지날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반들반들한 돌을 주워 다 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머니들은 그런 누름돌을 하나씩은 품고 사셨던 것 같다. 모든 분노와 설음을 누름돌로 김치를 눌러놓은 것처럼 그 무게로 자신을 죽이며 사신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시집살이하면서 누름돌로 자신을 누르고 희생과 헌신적 사랑으로, 오직 가족들만을 위해 그 아픈 시절 참고 견디며 짧은 삶을 사셨던 것 같다.

요즘 혼란한 시국에 들어서면서 내게도 그런 누름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같이 스쳐가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노여워하며 주제넘은 욕심으로 무참하게 깨어지는 아픔의 감정의 조각들을 지그시 눌러주는 그런 돌 하나를 품어 살고 싶다.

모진 풍파를 겪으며 한 세상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급한 성격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나서 서 참견하는 당돌함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병신년’ 넘기기 전, 그런 못된 성질을 꾹 눌러 놓을 수 있는 누름돌 하나를 잘 닦아 가슴에 품어 살고 싶다.

문득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친구지간에도, 이웃 간에도, 서로가 이런 누름돌이 되어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훨씬 밝고 맑은 아름다운 세상, 마음이 편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이 되겠지만, 필자는 성선설(性善說)을 더 믿는다. 모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났는데 살아오는 환경에서 선한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본다. 일례로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어린아이가 물가로 기어가는 것을 보고, 그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물가에서 건져내는 것을 보면 마음속에 선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마음속 깊이 누름돌 같은 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참을 수 있으리라. 이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조직체에서 사는 우리다. 그런 조직이기에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자연히 분노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범죄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크고 작은 사악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남을 비방하고 양심과 권력욕, 명예욕에서 자유롭기가 어찌 그리 힘든지, 악몽처럼 고달픈 일상에서 남에게 차갑고 까칠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세상에 일부러 남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동조한다면 나를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사람이야말로 잔인 한 괴물이기보다 스스로 병들어 괴로워하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증오나 공격성이 밖으로 불거지기 전에 마음속에서 삭이도록 기꺼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비정하고, 살벌하다 해도, 진정 서로 사랑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포근하고 따사한 사랑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한 마디의 말이다. 사소하게 들리는 말 한마디의 기적 같은 힘이 세상을 바꾸고, 운명을 바꿔놓는다. “부탁합니다.(Please)”라는 말이 그렇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적어도 타인을 악의적으로 착취하거나 도구로 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에게 부탁하는 일은 결코 비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활짝 여는 태도이며 남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때로는 무심코 한 그 말 한마디, 우리가 얼마나 더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Thank you)”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말하고, 감사한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그 같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고통과 욕구 불만의 소굴인 편협한 에고이즘에서 벗어나는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진정으로 표현하는 감사에는 가식과 저의가 숨어들 틈이 없다. 오히려 자기 밖에 모르는 에고(ego)의 아집을 꺾고 삶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당당한 자유의 몸짓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부탁’이나 ‘고마움’보다 좀 더 어렵고 쉬울 수도 있는 것이 ‘용서’라는 말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모든 비판과 앙갚음을 포기하고, 내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면제해 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용서를 택하는 이유에 대해 변명을 한다면 영혼의 암 덩어리인 증오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흔히 세 번을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도 있듯이 ‘용서’라는 말과 함께 ‘참음’에 대한 말을 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새 날을 맞이하면서도, 왜 어제라는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지,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가 어찌 그리 힘들고 어렵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악(惡)을 누르는 누름돌이 없어서일 것이다. 모든 증오와 울분, 고통을 내려놓고 자유를 향한 문을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용서와 참는 것도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하고 참는다면 오히려 마음에 병이 더 심하고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용서와 인내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대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되면 용서도, 참는 것도 다 해결되면서 마음에 병도 생기지 않는다.

최근 학우들과 송년회 자리에서 ‘백남기 사망 사건’과 관련, 댓글을 달며 논쟁을 한 적이 있는 한 학우가 그 당시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뜨거운 포옹 까지 했다. 그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흘려버렸던 일을 그 학우가 먼저 마무리를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 해가 가지 전 매듭의 마음이 풀어져 그 학우에 감사했다. 그 학우의 용기 있는 마음에는 누름돌이 있었나 보다. 어떤 사안이던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진정이 담긴 말, 단순하지만 남을 배려하려는 건강한 말이 뜻밖에 문제를 풀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마음에 쌓이면서 각자의 내면과 사회생활 모두를 잠식한 ‘악’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성껏 누름돌이 들어있는 김장독 항아리를 어루만지시던 어머니의 옛 모습이 유난히 그리워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인. 칼럼니스트. 한국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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