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시대 양잠3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세조실록 36권, 세조 11(1465)년 6월 9일 을유(乙酉) 첫 번째 기사에는 전 부사정(副司正) 이소생(李紹生)이 상서(上書)하기를, “도적(盜賊)의 근원은 빈궁(貧窮)한 데서 일어나니, 이것은 옛 성철(聖哲)과 명현(明賢)의 역력(歷歷)한 가르침입니다.

계강자(季康子)가 도적을 근심하여 공자(孔子)에게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진실로 그대[子]가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비록 상(賞)을 준다 하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고, 《관자(管子)》에는 말하기를, ‘예의(禮義)는 부유하고 넉넉한 데서 생기고, 도적(盜賊)은 빈궁(貧窮)하여 일어난다.’ 하였으며, 《우서(虞書)》에는, ‘백성을 양육(養育)하는 덕(德)이 있은 뒤라야 도적을 막는 형벌[刑]이 있다.’고 하였고, 《주관(周官)》에는, ‘이익을 흩고 조세(租稅)를 박(薄)하게 하는 정사가 있은 뒤라야 도적을 제거하는 법을 썼다.’ 하였으니, 만약 그 형법(刑法)을 먼저 하고 그 덕정(德政)을 뒤로 한다면 이것은 생민(生民)이 어육(魚肉)이 될 뿐이니, 어찌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겠습니까?

많이 모여 살고 무례하게 무리지어 핫옷[寒衣]을 입고 목이 말라 마시니, 누가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그 집을 편안히 하고 그 생업을 이루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한(饑寒)이 박절(迫切)하고 곤고(困苦)가 무료(無聊)하여 작게는 절도(竊盜)가 되고 크게는 강도(强盜)가 되니, 처음에는 엄한 형벌로써 그치게 하나 마침내는 또한 다스림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의식(衣食)의 부족(不足)은 도적의 근원이며, 정치와 부세(賦稅)의 번거롭고 무거운 것도 도적의 근원입니다. 백성을 양육하는 덕(德)에 힘쓰지 아니하고 도적을 그치게 하는 방도만을 힘쓰려 하니, 이것은 물[水]만을 그치게 하고 그 근원을 막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경상(耕桑)의 생업을 힘쓰고, 묵은 빚의 징수를 견감(蠲減)하니, 이것은 백성을 은혜로 양육하는 뜻이 지극함입니다. 칼[刀]을 팔고 소[牛]를 사는 풍습을 어찌 유독 발해(渤海)에서만 아름답게 보고 홀로 오늘날에는 보지 못하겠으며, 지게문[外戶]을 닫지 않는 풍속을 어찌 유독 중국당나라에서만 행하고 홀로 오늘날에는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신(臣)은 보건대, 근세(近世)에 도적의 흥행함이 그전보다 심한 것은, 성상(聖上)께서 인명(人命)을 불쌍히 여기시고 반드시 장물(贓物)을 징험하여, 추국(推鞫)하여 끌어당기지 말게 하고, 옥(獄)에 있다가 죽기에 이르면 관리(官吏)를 파출(罷黜)하니, 덕(德)이 지극히 우악(優渥)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도리는 너그럽고 사나운 것[寬猛]을 서로 구제함이 귀중하니, 대개 예의(禮義)는 군자(君子)를 교화하는 것이며, 형륙(刑戮)은 소인(小人)을 위엄하는 것이니, 그 허물을 알아서 고칠 수 있게 하면, 징계(懲戒)를 작게 하여 경계(警戒)를 크게 하는 것이니 소인(小人)의 복(福)입니다. 그 혹 악(惡)한 것을 조장(助長)하여 고치지 못하는 데 이르면, 형고(刑故)가 작지 않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의 부득이한 일입니다.

진서산(眞西山)은 말하기를, ‘수(隋)나라는 문(文)으로 하고, 제(齊)나라는 형(刑)으로써 도적을 그치게 한 것이 엄(嚴)하지 않음이 아닌데도 도적의 무리를 그치게 하지 못하였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요역(徭役)을 경(輕)하게 하고 부세(賦稅)를 박(薄)하게 하여서 이 백성의 의식(衣食)의 문(門)을 연지 수년 사이에, 산(山)을 다니고 들에서 자며 지게문을 닫지 않았으니, 그 잃은 것과 그 얻은 것을 귀감(龜鑑)할 수 있다.

물(物)은 총섭(摠攝)함이 있고, 일[事]은 기회(機會)가 있으니, 성인(聖人)은 그 요체를 잡아서 인도하면 잘 행하여질 것이요, 그치게 하면 잘 그쳐지게 되는 까닭에, 수고하지 않아도 다스려짐이 돼지[豶豕]의 어금니[牙]와 같다.’ 하였고, 범 문정공(范文正公)은 말하기를, ‘대저 도적은 혹은 기한(飢寒)에 핍박하고 혹은 가혹한 정치에 몰리며, 혹은 달래기도 하고 을러대기도 함에 두려워하여 작게 일어났다 큰 데에 이르니, 진실로 소간(小姦)이 없다면 호활(豪猾)한 무리가 자뢰할 수 없으니, 처음 다스리는 데 당하다.’ 하였습니다.

이제 도적이 날로 성하여, 옛사람의 말이 생각할 만한 까닭으로 감히 성총(聖聰)을 번독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멀리는 역대(歷代)의 책략을 추구(追究)하고 가까이는 선왕(先王)의 성문 헌법(成文憲法)을 몸 받으시면 심히 국가가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세조는 관료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소통하는 정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신 임금이셨습니다. 백성들의 안녕과 국토방위를 위하여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변방중심의 방어 체계에서 전국적인 지역 중심의 방어체계를 수립하였다.

호적을 정리하는 호패법을 강화하고, 보법을 실시하여 군정수를 백만명(百萬名)으로 확보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과전제도를 개혁하여 전직관료에게는 지급하지 않고 현직관료에게만 지급하게 하여 국고의 손실을 막았다. 세조는 조선 초기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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