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새로운 달력을 걸은 것 같은데, 벌써 가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10월 달력 앞에서 지나 간 여름을 생각해 보았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무더운 더위의 기세가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생물은 영원하지 않듯이 아무리 강열한 여름날의 햇살도 언젠가는 그 자리를 가을바람에 내어주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순리인 것 같다.

모든 계절이 계절 나름대로 인간에게 그 나름의 생각과 감성을 자극하며 의미를 부여하듯 가을 역시 인간들에게 많은 의미와 지혜를 깨우쳐주는 계절임에는 틀림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그중에도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성숙한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성숙하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어른스러워진다는 의미도 있다. 흔히 결실의 계절이라 고 하는 가을은 모든 생물의 발육이 절정에 이를뿐만 아니라 여름날처럼 뜨거웠던 혈기왕성했던 우리의 마음을 순하게 익혀가며 어른스럽게 한다.

그래서 어떤 지인은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면서 가을을 ‘성인기의 삶’과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청명한 가을은 밖으로 향하던 욕망에 대해,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으로 바꿔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숙에 이르는 단계다. 자신의 마음을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질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지칭하는 어르신이 그렇다.

진정한 어르신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칭한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 특히 자신의 허물에 대해 바로 보고 인정을 할 줄 알아야 그와 같은 허물을 갖고 있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품성이 되지 않는다면, 나이만 먹은 것뿐 어르신으로서의 대우와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문득 본인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내치고 갈등과 대결을 일삼으면서도 상대에게는 무조건 한뜻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등 소통이 아닌 불통의 관계를 갖고 있는 정치꾼들이 떠오르며 실소를 자아내게 된다.

왜 가을을 예찬하면서 ‘똥 묻은 개가 티 묻은 개를 꾸짖는다.’는 유형의 정치꾼들이 떠오르는지? 얼마나 미성숙한 처사이며 조소거리가 아닌가. 자기의 뜻일 뿐 다른 상대를 하나로 어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없는 사람은 어르신의 자격이 없다. 누구에게나 사계절처럼 단계가 있는 것이다. 꽃이 피는 봄이 있는가 하면, 수확한 열매를 거두는 가을이 있다. 특히 찌는 듯한 무더위의 여름은 성장을 하는 과정이다.

이시기에는 모든 식물이 오직 성장만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비바람을 이겨낸다. 그래서일까 모든 식물들은 한결같이 녹색이라는 옷을 입고 작열하는 태양의 빛을 이겨낸다. 모두가 녹색의 색깔로 있을 때는 각자의 다양한 특색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완연하게 각자의 또 다른 본질을 다른 색깔로 선을 보인다. 그것이 바로 단풍이다. 성숙한 가을의 오색빛깔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그 다채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는 녹색을 자랑하면서 뽐내던 나뭇잎들이 붉은 색조를 띤 단풍이 되면서 가을바람에 거부하지 못한 채 땅에 떨어져 무수한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마지막을 장식한다.

가을은 추수만 하는 계절만은 아니다. 추수를 하고 난 빈 들녘처럼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계절이기도 하다. 무성했던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나무처럼 소유했던 모든 것과 마음속에 있는 탐욕까지도 버리는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추석 한가위가 되면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가을의 풍요함도 있지만 그 풍요함을 이웃과 나누며 탐욕을 버리라는 뜻도 있는 나눔의 가을이기도 하다. 마음을 비울 때 남을 배려하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거부할 수 없으며 그 누구라도 대신할 수 없는 게 두 개가 있다. ‘태어 남(生)과 죽음(死)’이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뤄진다.

또 한 빌려 줄 수도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계절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지만 지금의 가을은 지난해의 가을은 아니다. 새로운 가을이다. 강물이 흘러가듯 되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도 꽃이 피는 봄이 있고 성장하는 여름, 그리고 결실을 맺는 가을, 마지막을 정리하는 겨울 등의 사계절이 있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색(思索)을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에는 사색을 통해 성숙한 어르신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아직도 2016년이 지나가려면 1백여 일 남짓 남았다.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날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이타적이 되고, 희생적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는 바로 ‘여기’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시간은 ‘지금’이다. 비우면 채워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가을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을 들어보자. 봄. 여름. 가을이 그렇게 흘러가듯 겨울도 쉬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지 않겠는가?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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