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의 비변책1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김종서는 고려 공양왕 2(1390)년에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9년(세종 원년)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며, 1426년 4월에는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의 수효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1449년 8월에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짐에 따라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평안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51년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고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묘는 세종 특별자치시 장군면(舊 충청남도공주시장기면)에 있다. 특히 그의 비변책에는 우국충정과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세종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비변책을 소개한다.

세종실록 88권, 세종 22(1440)년 3월 5일 정미 2 번째 기사에는 전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비변책(備邊策)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북방의 일에 있어서 그 큰 것을 거행하고 그 작은 것을 남겨 놓고, 그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그 느즈러진 일을 뒤에 하는 고로, 시행해야 할 일도 상달(上達)할 겨를이 없었사온데, 이제 질병에 걸려 아뢰지 아니하고 죽으면 신의 죄가 진실로 큼으로, 병을 이기고 억지로 기록하여 조목을 갖추고자 하였으나, 마음이 어둡고 기운이 약하여 섬세한 것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만일 예청(睿聽)을 입으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으며 지극히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회령(會寧)은 북문(北門)의 자물쇠[管鑰]이기 때문에 더욱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왕년(往年)의 수재로 그 평지(平地)의 좋은 전지가 많이 손해를 입었고, 또 도망한 자가 여러 진(鎭)에서 제일 많으므로, 이제 신의 근심이 바로 여기에 있고, 그 폐해를 구(救)할 바를 생각하였으나 진실로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본부(本府)의 원산보(圓山堡) 서북쪽 고산성(古山城) 아래에 1백 가(家)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묵은 땅이 있고, 녹야령(綠野嶺) 이남 부회환령(釜回還嶺) 사이의 평지와 산기슭에도 역시 1백 가(家)가 넉넉히 경작할 만한 땅이 있는데, 경원(慶源)은 지경이 광활하여 경작하고도 남는 땅이 있으니, 만약 종성(鍾城) 부근의 경원 땅을 떼어 종성으로 붙이고, 다음에 회령 부근의 종성 땅을 회령으로 붙이면 토지가 더욱 족(足)할 것입니다.

정군(正軍)의 도망한 자는 귀신이 아닌 바에야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을 것인데, 다만 찾기에 힘쓰지 않을 뿐이옵니다. 하물며 처음부터 각 고을에 입거(入居)한 문적(文籍)이 명백한 것이겠습니까.

그 각 고을로 하여금 기한을 정하고 조사해 찾도록 하고, 혹 찾지 못한 자는 그 족친(族親)이나 인리(隣里) 중에서 가풍(家風)이 유실(有實)한 자를 택하여 대신 들어가게 허락하여 원액(元額)을 보충하게 하와, 위 항목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오면 족히 생업을 유지할 수 있어 군액(軍額)이 줄지 않을 것입니다.

또 회령 정군(正軍) 중에 말[馬]이 없는 자가 58인이고, 경흥에 말이 없는 자가 25인이나, 비록 독촉해서 입마(立馬)하게 하였어도 재산이 부족하여 입마할 방법이 없다 하니, 청하옵건대, 제주(濟州)의 흠 있는 말[咎馬]과 본도(本道) 각 목장의 말로서 국용(國用)에 불합(不合)한 말을 찾아내어 분급(分給)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신(臣)이 동량(東良)에다 진(鎭)을 설치하는 한 일을 자나 깨나 잊지 못하여 항상 잘 아는 자와 저 사람들의 왕래하는 자에게 물어 보면, 모두 말하기를, ‘평지로서 경작할 만한 곳은 본래 적은데다가, 왕년에 많은 수해(水害)를 입었고, 옆에는 석산(石山)이 많아 험조(險阻)하므로 경작할 만한 땅이 또한 적다.’고 하옵니다. 무릇 읍(邑)을 세우고 군(軍)을 두려면 먼저 먹을 것을 넉넉히 할 도리를 강구한 후에야 할 수 있사온데, 진실로 사람들의 말과 같으면 한갓 저 사람들만을 소요스럽게 할 뿐이고, 실상은 성취하지 못할 것이오니,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감히 경(輕)하게 거행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하오나 사람들의 말은 믿기 어렵고 모름지기 친히 살피기를 기다려 그 가부를 정할 것이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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