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보면 다른 서적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행복을 위한 지침서’를 쉽게 볼 수가 있다. 또한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소개하는 여행사 전단지도 눈에 띈다.

행복은 보편적 종교가 되어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인생을 헛 살아온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추구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라도 하면 모두가 쉽게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기만 한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행복 또한 개인의 성찰을 용납하지 않은 채 시대의 흐름을 구성하며 사람들을 떠밀어낸다.

행복은 교과서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공자와 장자는 ‘행복은 인륜의 도(道)와 자연의 섭리를 성찰하고, 그에 합치하게 삶을 영유하는데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이성과 성찰의 능력을 귀하게 여겨 행복이란 삶을 이성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의 덕(德)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자나 장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이상적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의미와 가치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과(因果)로 이루어진 세상에 사는 우리는 우리 의사와는 달리 행복을 느끼며 만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행을 맞이하며 슬퍼하고 때론 고통스러워하며 세상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할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도 불행을 당하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하며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무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행과 행복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매주 목요일이면 필자가 초대 단장을 지낸 자원봉사단원들이 장애자 센터에 가서 급식 봉사를 한다. 이번에도 급식 봉사를 하면서 몇 사람의 장애자들을 보았다. 몸을 가누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자 중 한 분은 ‘목’을 바로 세울 수 없어 목이 뒤로 제겨진 상태에서 보호자가 밥을 떠 넣어주어야 했다.

또 한 분은 입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수저에 밥을 떠 넣어주어야 하는데. 사레가 들릴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조금씩 떠 넣어주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손 떨림으로 한번 밥을 입으로 가져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가고 힘들게 먹는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장애자도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기만 하다. 때로는 아는 채 하며 인사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살아 있는 자체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밥값(2000원)이 없어 식권 하나를 사서 식기 쟁반에 밥과 반찬을 배로 담아 가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도 보았지만 제재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단체는 무료 급식 자(생보 자)와 유료 급식자로 구분이 되어 있다.

독거노인도 있다. 이분들 중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버림받은 채 급식소를 찾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가족이 없는 분들도 많았다.

저렇게 고통스럽고, 외로운데도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고, 힘들 때마다 원망을 하며 삶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는 따뜻한 가정과 함께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사지(四肢)가 멀쩡하고 가정과 가족이 있는 우리가 저들을 보면서도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항시 잠시의 행복에 교만함에 빠지지 않고, 불행이 닥쳐와도 비관하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행복을 찾는 것과 관련, 엉뚱한 질문인지 모르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중에서 뭐가 제일 중요한 것일까?

묻는다. 대답은 현재다. 현재가 없는데 어찌 과거와 미래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를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게 생각한다. 행복도 그렇다. 모두가 지금이 아닌 다음의 행복, 미래의 행복만 찾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가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바로 지금 각자의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미래나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하게 보이는 행복의 ‘세 잎 클로버’는 외면한 채, 오직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만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지쳐 행복까지 놓치고 만다. 다시 말해 행복은 지금 내 곁에 가까이 있는데,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하며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한 철학교수는 “행복이라는 목적은 그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삼지 않을 때만 얻어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목표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 행복은 따라온다. 당신 스스로에게 행복한 가를 묻게 된다면 행복은 그 즉시 사라진다.” 다시 한 번 되새겨볼 만한 말이다.

조계종 원로의 원인 성파 스님의 설법이다. “‘청산원부동 백운자거래’(靑山元不動 白雲自去來) 청산은 원래 움직임이 없고, 흰 구름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구름이 많이 덮였다고 산이 자빠지나, 구름이 흘러갔다고 해서 산이 엎어지나 제아무리 구름이 왔다 갔다 해도 청산은 늘 그 자리다. 청산은 주인(主人)이고, 구름은 객(客)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주인과 객을 구별하지 못하니까 삶이 버거운 것이다”

어쩜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인지 모른다. 주어진 인연 속에서 최상의 삶을 구현하며 바르게 나아가는 삶은 진정 아름답고 성숙한 삶일지도 모른다. 욕심을 부리지 않을 때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존재한다.

불행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그때가 바로 행복한 때다. 행복에 무관심 한 채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용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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