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장군의 누에와 뽕나무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고려의 명장 문숙공 윤관(尹瓘) 장군은 7세 때에 누에와 뽕나무에 관한 한시를 지어 문장가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윤관 장군은 1040년 음력 6월 1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현에서 소부 소감 윤집형과 경주김 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 읽기와 글쓰기에 정력을 기울였다.

자는 동현(同玄)이오, 관향은 파평이시다. 공이 일찍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시고,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시고, 숙종 십 년에는 참지정사 함림원판사 태학사까지 되셨다.

이때 여진족이 북방에서 노략질해온 지가 오래었다. 예종 초에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고 국토를 확장한 문관 장군이었다. 여기에 여진 정벌과 9성의 완성을 약기한다.

고려 예종 2년(1107) 10월 고려 북방을 자주 침범한 여진을 정벌할 계획을 수립한 예종은 윤관 장군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에 임명하고 북벌을 단행하였다.

여진 정벌 군의 원수(元帥)가 된 윤관은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하고, 부원수에 임명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 정벌에 출정하였다. 윤관이 출정하자 예종이 서경에 가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윤관 장군의 부대는 적진을 공격하여 여진 촌락 100개를 장악하였다.

윤관은 점령지의 주요 지점에 국경선을 설정하고 성곽을 쌓게 하였다. 예종 3년(1108) 1월에는 영주성, 웅주성, 길주성, 함주성, 복주성, 공험진 등 6성을 완성하였다. 윤관이 점령한 지역은 동쪽은 대해에 접하고, 서북방은 개마산을 끼고, 남쪽은 장주와 정주 두 고을과 접하였다.

윤관은 계속 적진을 점령하여 성을 구축하니 그 해 3월에는 의주성, 동태 진성, 평윤진성이 완성되어 모두 9성이 완성되었다. 윤관의 동북 9성이 완성된 것이다.

땅 칠백여 리를 개척하였고 아홉 개의 성을 쌓고 국경의 경계에 빗돌의 세우고 개경으로 개선하니 왕은 공을 책록 하여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에 책록 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5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에 봉해졌다.

윤관이 7세 때 뽕나무와 누에를 두고 지은 시(詩)는 여충사 문숙공윤관장군묘역(麗忠祠 文肅公尹瓘將軍墓域) 큰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葉養天蟲防雪寒(엽양천충방설한)뽕잎은 누에를 길러 눈밭 추위를 막게 하네

枝爲强弓射犬戎(지위강궁사견융)
가지는 강한 활이 되어 오랑캐를 향하고

名雖草木眞國寶(명수초목진국보)
이름은 비록 초목이라도 참으로 국가의 보배로다

莫剪莫折誡兒童(막전막절계아동)
자르거나 꺾지 못하게 아이들을 훈계해야겠네

문숙공 윤관은 예종 6년(1111) 5월 8일에 생을 마감하셨다. 경기도 파주군 도탄 면 분수원의 북쪽에 묻히셨다. 후일에 고려 예종의 사당에 배향되시고, 조선조에서도 또한 숭의전에 배향하였다.

아들이 일곱인데 맏아들 언인(彦仁)은 벼슬이 지후(祗侯)이니 그 후손들은 남원(南原)과 함안(咸安)의 두 본으로 나누어서 대대로 계승되어 오고, 여섯째 아들 언이(彦頤)는 벼슬이 정당문학이요, 시호는 문강(文康)이니 지금 파평으로 관향을 한 사람은 모두 그 후손이다.

공의 공훈이 이미 나타나고 복택이 먼 데까지 미쳐서 안팎 자손이 번성하여 귀하고 현달한 명문 대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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