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 류달영 교수님의 수필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필자는 1960년대 대학에서 누에를 배우고 기르게 되었다. 누에를 관찰하면 신비롭기 한이 없다. 뽕을 먹는 소리가 즐거운 음악을 감상하는 것 같다. 누에 한 마리가 뽕 먹는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수 만 마리가 뽕을 갉아 먹는 소리를 들으면 주룩 주룩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 감회에 잠기곤 한다.

누에가 뽕 먹는 소리는 2010년 환경부가 우리 주변의 자연 환경과 자연을 벗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리를 발굴하여,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발간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 중의 하나이다. 필자는 대학을 마치고 지방대학교단에서 잠업을 교육하였다.

누에 사육기에 학생들이 뽕을 주고 난 뒤에 잠실에 들어가게 된다. 잠실에 들어가면 누에들은 사각사각 뽕잎 갉아 먹는 소리로 환영의 연주를 하여 주었다. 조용히 수많은 누에들의 뽕 먹는 합창 소리를 들으면 학창 시절의 교수 한 분을 생각하게 된다. 대학 도서관에 보관된 장서의 뒤쪽에 붙어있는 열람카드 보관용 봉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이름 없는, 들풀도, 사라져 버림도, 영원히 빛날, 삶의 광영도, 젊은 날의, 쓰임새에 달렸거니,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거나”

필자와 학우들은 이 글귀를 외우면서 독서를 하였다. 이글은 성천 류달영 교수께서 작사 하셨다. 성천 유달영 교수님은 필자가 대학시절 한국의 새마을 사업을 주도하셨습니다. 필자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 직접 강의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의 철학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성천 류달영 교수님은 “누에와 천재”라는 수필에서 주인공은 누에가 재주가 많아 큰누에 다섯 마리를 먹으면 천재가 된다는 말을 믿고 누에를 먹기로 결심을 하고 남 몰래 잠실에 들어가 누에를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깨끗한 누에를 고스란히 삼켜서 곱게 내 몸 속에 흡수시켜야 그 '비상한 재주'가 조금도 허실이 없이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일시 혼란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누에를 한 마리 집어 입안에 넣고 그대로 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누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야단이고, 속에서 욕지기가 나서 뱃속에 있는 것이 모두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시 죽을힘을 다하여 혓바닥을 안으로 우기기도 하고, 목구멍을 크게 벌려 보기도 하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징그럽게 큰 누에도 최대한의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땀은 비 오듯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인내의 욕망은 누에를 목구멍 너머로 넘기는데 기어이 성공했다. 그러나 식도에서도 위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고 꿈틀거리고 들러붙고 야단이었다.”고 기록하여 천재가 되겠다는 의지력은 전신을 누비는 괴로움과 고통을 참는 인내력을 후학들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셨다.

그리고 수필의 말미에는 “나는 '비상한 재주' 가 확실히 생긴다고 하더라도, 다섯 마리의 누에를 산채로 삼키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건실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할 때에 스스로 재주 없는 것을 탄식하기보다는 스스로 꾸준한 노력이 부족함을 뉘우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것이다. 뉴턴의 겸손과 에디슨의 노력은 그들의 발견과 발명보다도 더욱 귀중한 유산으로 생각된다.”고 기록 하셨다.

성천 류달영 교수님은 1911년 5월6일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에서 출생하셨고 1933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1936년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과 졸업하시고,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셨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과 투옥된바 있으며, 1946년 서울대 농대 조교수로 취임하셨고, 1951년 대구로 피난 중 “새 역사를 위하여” 저술하셨고, 1956년 교환교수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 코넬 대학에서 연구를 하셨다.

19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장 취임, 1967년 대한가족협회장, 1973년 서울대 교수협의회장, 1979년 서울대 명예교수, 1981년 대한민국 국정자문위원에 위촉, 1983년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 창설, 초대 원장 취임, 1984년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 창간 발행, 1985년 한국무궁화 연구회 창립, 회장 취임, 1990년 한국농어민신문사 창간, 1991년 성천문화재단 설립, 초대이사장, 상허 문화재단 농촌부문 상허대상 수상,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수상, 1995년 대산농촌문화재단 제 1회 대산농촌문화상 수상, 대한 적십자 인도장 금장 수상, 1997년 유한재단 제2회 유일한 상 수상, 1999년 금탑산업훈장 수상, 2001년 인제인성 대상 수상하셨다. 2004년 5월 27일 94세로 생을 마감하시니 유해가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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