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좋은 만남, 나쁜 만남이 되기도 하고, 또 그리움의 만남, 짜증스러운 만남이 되기도 한다.

일방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는 상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경계를 하게 되고 두려운 생각에서 어색한 만남이 이뤄진다.

그러나 만나는 횟수가 늘고 대화를 하다 보면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진다. 생각도 같고, 또 고향도 같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학교를 나와 동문임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성도 같다는 것을 알면서 더욱 친숙한 관계가 된다.

문제는 이런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면 서로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아닌 갈등의 관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상대가 자신과 많이 닮았고, 뜻이 같고, 또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였는데, 성격이나, 생각은 물론 취미나 심지어는 음식 취향까지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실망을 하게 되고 갈등을 느끼며 배신감으로 결별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사람이 변하고 자신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자신이 그 사람의 보이는 일부분만 보고 자신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상대가 변하거나 잘못 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만남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힘들게도 하고, 때로는 즐겁게도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 가까워지면 '사생활'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또 너무 거리를 두면 사회성이 떨어지고, 거만하다는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땐 모든 게 다 좋게 보이지만, 나쁜 감정이 되면 모든 게 다 나빠 보인다. 더구나 개판이 된 정치권과 각종 흉악한 범죄 기사로 스트레스가 눈(雪) 쌓이듯 쌓이는 요즘에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두렵기까지도 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일상에서 압박감을 느끼며 교통체증에 대해서도 심한 짜증을 부리게 된다. 성격이 난폭해지고 또한 습관적으로 자신이 심한 우울증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고 우울한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일시적 기분과 심각한 증상을 혼동하고 육신은 물론 마음까지도 심각한 상태가 되고 있다. 인도의 간디가 한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나의 내면의 고요한 목소리다”라는, 그러나 이 소란스러운 일상의 날과 짐승처럼 아우성치는 세계,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에서 어떻게 그 내면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누구든 두 눈과, 두 귀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채 적절한 대책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 눈(眼)과 두 귀가 있다는 것은 편견을 갖고 사물을 보지 말고 공평하게 들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입 닫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입을 다물면 불안과 두려움과 불만족에 대한 것들이 오히려 정제되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법을 터득하게 만들어준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일상의 탐욕, 불안, 고통, 생각일랑 그냥 흘러가게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내 안을 휘젓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된다.

다만 소의 되새김질처럼 자꾸 미련을 갖고 정작 내 마음 깊숙이 잠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되니까. 미움도 생기고 나쁜 마음도 생기면서 상처도 받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평온한 마음이 되려면, 좋은 만남의 관계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많이 들어주는 것이다. 마음의 귀를 활짝 열면 곧 그것이 화평이다. 나만의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내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모든 만남의 기회를 소중한 선물로 생각하고 끌어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은 입을 다물고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 사랑하는 사람, 이웃과 벗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그런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를 하는 우리가 되자. 그리고 가끔은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문자라도 날리는 여유를 갖자. 그리고 전화 통화라도 날리면서 수다를 떨며 한편으로는 상대의 목소리에 정성껏 귀를 기울여 듣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마음을 보이자.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생각과 방법이 달라지면 우리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 1920년대,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시각 장애인입니다'라고 적힌 푯말을 앞에 놓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공원에서 구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 한두 명만 적선할 뿐 그를 눈여겨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한 남자가 시각 장애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자리를 뜬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시각 장애인의 적선 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일까? 푯말의 문구가 다음과 같은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봄이 곧 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답니다.(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푯말을 이렇게 바꾸면서 장애노인의 적선 통에 동전이 가득하게 만든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인 앙드레 불톤 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냥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먼저 ‘그냥’이라는 말 한마디만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여유가 있는 삶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배신감을 느끼며 남을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거침없이 내뱉는 말이 화근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얼마 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처럼 택시를 탔는데, 우연히 운전석 앞쪽에 눈길을 끄는 안내 스티커를 보게 되었다.

“손님과 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 자주 다니시는 지름길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모처럼 편안한 마음이 되면서 웃음이 나온다. 모두가 이런 운전기사의 마음처럼 될 때 우리는 서로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과거는 추억을 만들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추억을 더듬고 사는 우리네 세대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유도 달지 말자. 그냥 ‘좋다’라는 말만 하며 밝은 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하자.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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