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명문 대학에서 학생들이 많이 출입하는 ‘카페 운영자’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고 가정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못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명예박사학위는 거액의 학교 발전 기부금이나 장학금을 헌납하거나, 또는 대학발전에 공이 크거나, 아니면 사회.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 대학 발전에 도움을 바라고 수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학생들이 차(茶)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또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준 공(功)을 인정, 카페 운영자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준다고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대학 부근에 있는 토스트와 햄버거를 파는 ‘카페’ 주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 대학가의 카페(찻집)가 붐비는 것처럼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토론문화와 함께 건전한 정신을 함양케 한 공로’를 인정, 보스턴 대학에서 카페 주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이다. 우리 문화 수준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뭔가 튀는 것을 인정하는 미국 사회가 자못 부럽기까지 하다.

미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열심히 연구하여 좋은 실적을 거두면서 취득하는 박사보다 글자 그대로 명예박사를 더 대단하게 여긴다. 그래서일까 ‘가짜 박사’는 있어도 ‘가짜 명예박사’는 없다.

젊은이들이 차와 호프를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토론을 즐기고, 또 양서(良書)를 읽으면서 지식을 얻는 그 광경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상상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지 모르겠다. 그러한 토론 문화가 오늘날 세계 초강대국, 거대 미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헤아릴 수도 없는 다수 인종이 모여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사회를 한 점 흔들림 없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힘은 소통이 되는 토론을 통해 사회 밑바닥에 잠재한, 어쩌면 아주 묵살되어 버릴 수도 있는 소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통로로서의 토론문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범법자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권력이 행사되며, 또 그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지켜보는 국민도 범법자를 옹호하기 위해 공권력에 대항하지 않는다.

주정부 의회 부의장이 시위를 하다 ‘폴리스 선’을 넘으면서 경찰이 손을 뒤로하고 수갑을 채우는 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하게 응하고, 주위에 있던 지지자들도 경찰에게 난폭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현장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의사는 강하게 밝히되 법을 위반했을 때는 그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자세를 보였다.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어떤가? 토론 문화는커녕 차라리 ‘안티 토론 문화’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심지어는 가족 간의 애정이 오가는 밥상 앞에서도, 직장에서 의견 수렴 장소인 회의석상에서도, 대다수의 의견에 역행하는 소수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달가운 대접을 받지도 못한다.

대접을 못 받는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아주 불평불만이 많은 자로 낙인이 찍혀 수모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은 주도하는 리더 급 의견이 전체를 대변하는 양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단점일 수도 있다. 다수의 의견이 잘못 판단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취재와 함께 학업을 위해 잠시 미국에 체류 한 적이 있었다. 일상에서 아주 작은 일인 것 같았는데 그들은 법을 준수하고, 상대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들어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병원도 예약시간에 맞춰서 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했는데, 그 의구심이 쉽게 풀렸다. 그들은 도로의 속도를 준수하면서 시간을 맞춘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몇 Km의 속도를 내느냐에 따라 시간이 계산되는 것이었다.

또 아무리 급해도 난폭한 운전을 하지 않을뿐더러 차가 끼어들면 양보를 한다. 행여 교통위반으로 경찰이 딱지를 떼도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거나, 신분을 밝히지도 않는다. 일과 후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야말로 신분에 귀천이 없다.

경찰도, 교수도, 정치가도, 환경미화원도 모두 격식 없이 호프 잔을 놓고 토론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정치에 대해서는 토론을 하지 않는다. 마치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같다. 그저 하루에 일어났던 이웃의 이야기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학력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전문분야에서든 그 직을 열심히 감당하고, 능력을 인정할 뿐이다. 티셔츠를 입은 경찰과 청바지를 입은 환경미화원이 허심 탄하게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부럽게만 생각하기도 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토론을 하는 미국.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귀국 후 한국에서 배움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도 분위기상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가 다르고, 의식이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다.

요즘은 청소년 사이에 시대 흐름을 반영이라도 하듯 학벌보다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던 박찬호, 박세리, 최수종은 물론 세계적인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도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우리의 대포(대학을 포기한 젊은이)에게는 충분한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실 사회에서 환상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20% 정도가 대학을 진학에서 취업과 결혼이 보장되었지만 지금은 80%의 대졸자가 배출되면서 희소가치가 떨어져 취업이 어렵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남보다 몇 배의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도 갈 곳이 없어 방황을 하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금력, 권력, 지연, 학연을 바탕에 깐 인맥보다는 능력과 현실적 기여도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을 여러 번 겪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에 무척 행복해 보인다거나, 또는 몹시 불행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남 보기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사실은 행복한 사람일 수 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사실은 남모르는 불행을 앉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렵고 힘든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자신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일류대, 학벌, 권력이 사라져 기존 질서에 대한 고정관념이 해체되고,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어 톡톡 튀는 그런 사람들의 실리와 명분을 앞세우는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톡톡 튀는 사람들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오늘따라 미국의 카페 주인의 명예박사가, 그리고 그를 인정하는 선진 미국 사회가 우러러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굳게 닫힌 철문을 여는 것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다. 고정관념의 틀을 버리려면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게 바로 작은 열쇠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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