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의 한기가 제법 가슴을 파고드는 초가을 저녁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든가 싶게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천지를 온통 어둠으로 뒤덮으며 내게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며칠 사이에 사랑하는 배우자나 부모님 등 소중한 가족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그 충격으로 슬픔에 쌓인 몇 가정의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위로하고, 또 삶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의감도 들면서 삶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근래 들어 암(癌)으로 운명을 달리 한 친척이 있었고, 또 죽마고우도 있었다. 그 친척은 얼마나 전 가족 행사에 왔을 때도 상냥하게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동문 산행에 함께 하며 잔디에 앉아서 호탕하게 웃으면서 내게 좋은 문자를 보내줘서 많은 위로가 된다며 무척이나 고마워했던 고향 친구.

모두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은 했겠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리라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몇 해 전에는 종합병원에서 ‘위염’이라며 처방해준 약을 먹다 고통이 심해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췌장암’ 말기라는 소리를 듣고 낙심하다 돌아가신 지우(知友)가 있다.

그분은 병문안 간 내게 “다시 퇴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재산을 좋은 일에 사용 하겠다” 라고 했지만 6개월 한시적 생명마저도 못 지키고 3개월 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분은 자신의 재물에 대해서는 한 푼도 갖고 가지 못 했다.

영정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도 살아생전에 좀 더 이웃을 생각하고 베풂의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과 사별의 아픔으로 가슴 아파하는 가족들, 어느 날 갑자기 보내야만 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가슴이 메어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어지는 게 눈물이 난다. 가족과 사별한 이들 유가족에게 과연 어떤 말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암담할 때도 많다. 언제나 그런 아픔은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항상 그런 이별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지금의 서글픈 현실이다.

누구든지 지각(知覺)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혹 자기 스스로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속의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필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자신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던져보면서 그때마다 느껴지는 생각을 메모지에 정리해보지만 명쾌한 답은 구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전철 안에서, 때로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름이 있으면 어디에서든 상관없이 메모를 해왔다.

그런 까닭에 어떤 때는 길을 가면서 메모를 하다 보니 경적을 울리는 소리에 놀라 길 옆으로 피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또 길가에 맨홀 뚜껑이 열린 곳으로 빠진 적도 있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백 년을 산다 해도 짧은 세월이련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 늘 오늘만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은 조금씩 생명이 단축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분명 어느 시기에 이르게 되면 종착지에 도달하게 된다. 출발이 있으면 종착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중병에 들거나 뜻하지 않은 권고사직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대개는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에 대해 당혹감을 갖게 되는 것을 보았다.

아울러 덧없이 지내온 삶의 허망함을 느끼며 삶에 대한 애착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을 체험했다. 만약이지만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가족에게 잘 하고 이웃에 대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말을 한다.

정작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와 함께 자기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정말 1분(分)을 백 년 같이 소중하게 살 것이라고 다짐한다. 또한 삶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그런 사실을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자갈 덮인 해안을 향해 파도가 이는 것처럼 시간은 끝을 향해 빠르게 흘러간다.’ 고 한탄했다.

시한부 인생, 인생의 끝이 있기에 우리는 슬픔이란 것을 알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 벗들을 잃는 이별의 아픔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혹자는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삶이 있는 곳엔 반드시 죽음이 동반하게 된다. 머지않은 날 우리는 붉게 물든 단풍잎과 떨어져 밟히는 낙엽을 바라볼 것이다. 한정된 삶의 가치를 재인식하며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한 번도 연습하지 않고 경험도 하지 못한 약속된 그날을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훈련을 가져보면 어떨까. 지금의 심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리움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인데.... .그 오늘이 흘러가는데도, 맞이할 수도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우둔함이여. 오늘 이 시간, 지금 이 순간, 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바쁜 일상의 시간이지만 가끔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요즘 살기가 어떠냐고 흘러가는 말처럼 카톡이라도 보내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기왕 살면서 모두에게 행복을 주며 베풂의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내 것을 마구 퍼주어도 아깝지 않고 마르지 않는 게 바로 사랑이라네.”

우리 속담에도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아픔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결국 서로의 심정을 알게 되면 나만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나만 슬픈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처럼 세상은 사랑으로만 서로서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아픔과 아픔으로 도 연결되고, 우리가 원래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하나’라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목요일과 토요일엔 또 장애자들과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급식 봉사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급식 장에 오시는 장애자와 독거노인들 한 분 한 분께 가족같이 정성을 다해 모시고 싶다. 추석이 다가온다. 어쩜 저들의 아픔은 사랑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곁에 가족이 있음에, 창밖에서 들리는 소음 소리에,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생명이 있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며 소중한 오늘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자.

모든 것은 다 지나치면 그만인 것, 강자도 약자도 한을 품을수록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설령, 가을 낙엽처럼 그렇게 떨어져 헤어진다 해도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대와 나와 우리, 좋은 일만 기억하는 온유한 자가 되도록 기도하며 그 아픔이 치유되는 또 다른 새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아무리 바쁜 삶이라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자신을 되돌아볼 줄아는 여유의 시간을 가져보자.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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