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있다면 아마 그것은 ‘죽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돈 많은 재력가도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권세가도 모두 죽음 앞에선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마음이 된다. 그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언젠가는 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잊은 채 물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힘겹게 살아간다.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생명체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에게 그런 두려움의 죽음이 오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태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다.

특히 우리는 주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접하면서 인생의 가장 진한 비애(悲哀)와 상실(喪失)을 체험하는 가운데 생(生)의 무상함을 느끼며 우울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지난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짧은 몇 날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의 이별을 고하면서 그들을 애도하며 떠나보내야만 하는 마음의 상흔(傷痕)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50대 젊은 나이에 가족들을 모두 남겨놓고 갑자기 떠난 조카도 있다. 조카사위가 아내에게 띄운 편지를 보았다. ‘호흡곤란으로 산소마스크를 쓴 채, 중환자실로 들어가기 전 필담을 나눌 때 “배고파”라고 쓴 손바닥 글이 지금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또한 중환자실에 있을 때 출입문이 열리면 멀리서나마 바로 보이는 자리에 네가 있기에 출입제한 시간에도 문만 열리면 서로를 확인했던 게 잊혀 지지 않는구나.

생전에 숨쉬기를 힘들어했던 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힘이 든다. 이번에 퇴원하면 단합대회 겸 모두 모여 노래 방 가자고 약속도 했는데, 불렀을 노래, 가사만 다시 읽어줄게.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울어버릴 것 같다.

아!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더 만져주고, 더 보듬어 줄 걸 하는 마음으로 후회한다. 조카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줄 모르고 카톡으로 ‘마지막 노을을 사랑할 수 있고, 해 저문 노을을 미소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마지막 인생을 넉넉하게 관조할 수 있는 여유로운 이별의 노래를 부르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끈끈한 삶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힘든 여정일지라도 어떤 고난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조화롭게 뒤 섞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카톡을 보낸 후 늦은 시간에 조카가 보낸 문자가 떴다.

반가운 마음으로 열어보니 “아저씨, 현이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받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띄운 마지막 글이 마치 조카의 운명을 예견 한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프고 저려온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알면서도 이런 날을 준비하지 못하다 보니 남은 자로서 마음 아파하고 후회를 하게 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나 간 시간이 된다. 흔히 인생을 배우려거든 눈물과 슬픔의 이별이 있는 상가(喪家)를 찾으라는 말이 있다.

일찌감치 삶이 죽음을 완성해가는 과정, 혹은 죽어가는 과정이라 느꼈다 해도 어느 누구인들 죽음 앞에서 죽음이 존귀하고 아름다움의 순간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인생 최고의 피날레이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런 죽음이 나이에 따라 순차적이지 않고 생리적인 노화현상으로만 오는 자연스러움에 있지 않다는데 있다. 이 땅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죽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종교는 어쩜 죽음 때문에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어느 종교도 죽음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풀어내고 만족할만한 해답을 던져주지 못 했다. 다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원대한 신(神)의 계획에서 이루어진다는 일방적인 해석으로 그 비밀을 다독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연약한 우리 인간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두려워할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91년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1년간 인턴(임상목회) 과정을 밟으며 암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의 상담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죽음에 대한 분노와 함께 떠나는 순간까지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가족을 염려하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다.

누구든 아침에 다시 눈을 뜨고, 창밖의 소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 하루하루의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런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미움과 상처, 슬픔을 결코 남겨놓아도 안 된다.

상가를 갈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나보다는 남을 위한 삶으로 세상을 밝고 맑은 마음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덜 후회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진지한 반성이며 삶에 대해서는 보다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침묵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느낌으로 전해준다. 고인이 된 분들의 전화번호를 차마 삭제할 수가 없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또 문자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정을 했다. 이름 앞에 ‘고’(故) 자를 하나 더 넣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추석이다. 그때쯤이면 조상의 묘를 찾는 성묘객들이 늘겠지.

고향을 향해 가는 불빛 행렬을 상상해보면서 땅을 기는 애벌레로 짧은 생을 마치지 않고 나비처럼 탈바꿈되어 좀 더 높은 곳을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그래서 더 큰 사랑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죽음은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다른 방으로 옮기는 것일 뿐, 그래서 우리는 늘 있던 자리에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 슬프게도, 아쉽게도 생각하지 말자. 그 대신 이웃을 사랑하며 포용하는 마음을 갖자. 테너 박홍섭이 부르는 ‘저 구름이 흘러가는 곳’을 늦은 시간 음미하면서 이 땅을 떠나간 모든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한다.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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