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날도 덥지만 부쩍 기분이 우울해지고 공연히 서글퍼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때가 많아지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뭔가는 써야 하겠는데, 정리가 되지를 않으니 첫 줄로 운을 띄우기까지 고민과 함께 진한 고통을 느끼기까지 한다.

“글을 쓸 때면 마치 아이를 낳는 산모처럼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한 문우(文友)의 말이 떠오르며 그 말의 의미를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늘 글을 쓰는 데도 보통 애를 먹이는 게 아니다. 글을 쓰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보고 듣고 생각했던 일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뿐인데 마치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이 이렇게 힘들다는 표현을 하게 된 연유는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바로 혼신을 다해 심중에 있는 말들을 쏟아놓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글을 쓸 때면 가끔은 두통을 느끼며 마음이 아플 때도 종종 있다. 어떤 문인 선배의 말대로 붓을 잡은 지 십수년, 이제는 중견 작가 소리를 들은 정도의 연륜이 붙었지만 점점 글쓰기가 어려워지고 붓을 놓고 싶을 때도 많아졌다. 이처럼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는 자기감정에 빠져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도 하고, 슬퍼하며 깊은 상념에 젖기 때문이다. 더욱 번민하게 만드는 것은 글에 대한 내용과 내 자신의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어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읽는 이들을 의식해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글로 옮길 수 없다는 사실에서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의 삶 속에 비치는 행함과 인격이 일치 하지 않는 답답함으로 처참하게 부서져 버리는 자존심은 서글퍼지기 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붓을 꺽기는 싫었다. 생(生)이 다하는 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그나마도 부족한 글을 통해 인간애를 잃지 않게 하고 싶어서다.

그런 까닭에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힘이 들고 서글퍼질 때도 글쓰기를 회피하지 않고 감사하며 어떤 글로 표현을 해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간혹 방송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드라마의 줄거리가 한 결 같이 출연진의 얼굴만 달랐지 권모술수와 밀실에서의 음모, 배신, 복수, 무자비하게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등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특히나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 탤런트들이 음모와 술수를 연기할 때 노련한 연기를 펼치다보니 이를 시청하는 대부분의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예외 없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 속에 빠져 그들을 미화 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의 선비들은 소수의 정략적인 이들을 제외하고는 지조를 지닌 선비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그 같은 역사는 정사(正史)속에 무궁무진하게 감추어져 있다. 정사를 밀어내고 야사(野史)에서 교훈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문득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와 권력투쟁, 암투 역시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 정란시대의 무정부 상태를 연상케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욕하고 비하하는 막말을 해도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 언제인가부터 그들이 영웅이 되어 있는 희한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비정상이 정상을 삼키고 정상인 것처럼 되어버린 참혹한 사회가 되었다. 개혁을 한다는 정치권은 여전히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어도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못된 권모술수를 답습하고 있다. 비상식이 상식처럼 되어버렸고 술수가 정도처럼 인식되었고, 개집 짓는 것 보다 더 쉽게 ‘당’을 만들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정당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찾아볼 수 없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정치권이 자신의 작은 이득이나 명예를 위해 대의(大義)를 저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어찌 사극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간주 할 수 있겠는가. 과거나 현실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권모술수가 있는 정치인 것 같다. 남을 탓하고, 상대를 헐뜯고, 배신하고, 철새처럼 이당 저당 끼웃거리는 모습이 그렇다.

가깝게는 70년대, 멀리는 고려, 조선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들이 보여 준 정치형태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에 어쩜 그 보다 더 심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당파 싸움, 계파싸움으로 대부분의 날들을 낭비하는 등 세비만 축내면서도 여전히 대립은 전혀 그칠 줄 모른 것 같다. 이들의 행태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선을 근 것도 모자라선지 동서가 갈라지고 지역 계층 간에도 나뉘게 해 국민 상호간에도 합리적인 사고나 의심 없이 사람과 일을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살고 잘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아주 그릇된 사고 속에서 힘겨루기나 하면서 이권만 챙기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무슨 일이든 자신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면 동지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더 생각 할 것도 없이 적으로 단정 짓고 제거를 위한 안간힘을 쓴다. 사회도 정치권과 다를 바 없다. 서로가 경쟁하는 입장이 되거나 또는 제거해야 할 표적이 되면서 본업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비리를 캐려고 하고 비도덕적인 면을 부각시켜 그 사람을 아예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인재 하나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데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 하다 보니 나라가 세워진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올바른 지도자나 전문가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지도자나 전문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회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된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 의 이중 잣대로, 그것도 사적인 영역을 너무 확대해 평가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아무리 글을 쓰기는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시원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겁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반성이고, 성찰이다.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에 대한 처절한 자기반성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많은 날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근 7년 넘게 칼럼을 쓰다 보니 만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요즘은 야당 ‘혁신 위’가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못해선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작업을 했다. 국회의원을 늘리자는 것이다. 그 말썽 많고 제 기능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비례대표를 늘리자고 했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제 정신이 든 사람이라면 감히 의원수를 늘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국민 10명 중 7명이 국회를 해산시키자는 여론이 들끓고 있는 마당에 그런 뻔뻔한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들 말대로라면 무려 69여명을 더 늘여야 한다. 국회의원 1인당 들어가는 일 년 예산이 7억 원이 넘는데, 일도 안하고 의사당에 있기보단 야외 투쟁을 일삼고 200가지의 특권을 누리며 ‘갑 질 중 갑 질’이 되어 이 나라를 개판으로, 종파분자, 좌파세력들이 날 뛰는 세상을 만들어 놓은 자들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준 것도 빼앗을 판이다.

세상이 이 모양이 다보니 나름대로 진통을 겪으면서 쓴 글과 마지막 한 줄을 마무리하지 못해 긴 시간을 안절 부절 하며 썼다 지웠다 를 반복하며 심한 두통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글을 써야 하는 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전히 글을 쓰지만 늘 고독과 소외와 절망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현실에서 허무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잊혀 지기 싫어서,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붓을 잡아 지면을 메꾸는 작업을 할 것이며, 지금도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날을 기다린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이 밤도 붓을 들으리라.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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