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사랑’ 은 좋은 단어이며 듣기에도 매우 아름다운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랑을 느낄 때 행복도 있는 법인데, 정작 이런 행복과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마음에 담아두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행복과 사랑의 정의를 정작 뭐라고 답변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가치가 완전하게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행복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덕을 쌓으며, 자연과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윤리 도덕을 지킴으로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짓 속에는 행복이 없다. 다만 문화 속에서는 나라마다 다소 행복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문화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행복의 가치는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에 대한 의식 중의 하나인 행복의 조건이 2013년에는 건강(36.8%), 가족(35.0%), 돈(14.1%)의 순이었으나 지난해에는 경제 침체 때문인지 돈(32.4%)이 제일 먼저로 하고 다음으로 건강(32. 1%)과 가족(24.0%)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후진국 형이다. 우리 스스로는 많은 발전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 지적(知的)으로는 후진이라는 뜻이다. 국민 소득 2만 달러가 넘고, 국내 총생산도 세계 13위, 수출입 규모도 11위의 무역대국에 속할 정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178개국 중 하위급인 102위다. 반면에 우리가 미개한 나라라고 알고 있는 나라들이 오히려 행복지수는 선진국보다는 훨씬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수치를 볼 때 행복의 기준 수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게 한다.

어쩌면 그 행복이란 내가 지금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더 얻음으로써 느끼는 행복감이 아니라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잘 다듬어 다른 이에게 나눌 수 있는 여유로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개한 나라라고 보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없는 행복을 채우려는 상대적 욕심, 채우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단지 지금 갖고 있는 작은 것에 만족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행복을 더욱더 소중하게 하고 있어 선진국을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지수가 높은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잡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부족을 생각했고, 또 언제나 잡고 싶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어 굳이 많이 잡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러니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불행을 느끼지도 못하고 현실에 만족을 느끼게 되다 보니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 인생의 기준은 행복이다. 잠시 자신의 지난날들을 뒤돌아보자 과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는가. 혹은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인가? 아님 불행한 것인지? 이 같은 질문은 인생의 목표 수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행복하게 되기를 원했지만 대부분은 그런 행복을 쉽게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다. 행복의 조건을 외적인 환경, 타인과의 비교로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좋지 못한 외적인 환경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지만 좋은 외적 환경도 우리에게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내적인 보람과 의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정작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어렵고 좋지 못한 외적인 환경이나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반응이다. 내가 아닌 남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관심(메다드라즈)’이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 하나를 들어보자. 금혼식을 맞이한 한 노부부가 일가친척과 함께 축하연을 치르며 바쁜 하루를 보내다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식탁에 앉은 남편이 갓 구은 빵의 양쪽 귀퉁이를 잘라 아내에게 내밀자 아내가 버럭 화를 내며 말한다. “지난 50년 동안 그 맛없는 빵 귀퉁이를 주더니 결혼 50주년이 되는 오늘도 고작 빵 귀퉁이를 먹으라고 주는 거요? 평생 빵 찌꺼기만 먹고산 나는 참으로 지지리도 복 없는 년이여.” 하며 울먹인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싫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난 이 빵 가장 자리가 노릇하게 잘 구워진 빵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빵을 새로 구울 때마다 늘 그 부분을 떼어 내게 주셨거든요. 결혼해서는 그래서 사랑하는 당신에게 양보 한 건데.... 아무 소리 안 하니까 나처럼 그 부분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평생 남편이 주는 빵 찌꺼기를 받아먹었다고 생각하는 아내가 행복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빵을 평생 싫어하는 아내에게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고 건네준 남편이 행복했을까? 행복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흔한 말로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웃어야 한다.”라고 한다. 15초만 박장대소해도 몸에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어서 치매가 예방되고 수명이 연장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잘 웃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나누고 싶은 여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누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웃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마음을 갖고 있고, 인색한 마음을 가져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 경기도 안 좋고, 정치권도 개판인데, 한 술 더 떠 메르스 같은 감염 병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등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기피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외출도, 쇼핑도, 외식도, 약속까지도 줄였다.

심지어는 상가(喪家)까지도 가지 않아 텅텅 빈다고 한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힘든 세상이다. 여기저기에서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자. 신나게 일하면 오히려 즐거움을 더 해준다. 성경에도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고 기록되어 있다.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즐거운 마음이 되다 보면 세상을 이길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유쾌한 에너지가 넘쳐나서 소통까지도 원활해진다. 경기 불황까지 겹치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웃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소중한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웃음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도 많다. ‘웃자’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고 행복한 사람이 되자. 행복이란 떠든다고 오는 게 아니고 TO가 있어 어느 누구 하나에게만 오는 게 아니다.

이 세상 각자가 누리는 것이다. 바라건대 7월의 영광스러운 신록 속으로 비판과 분노를 걸러 낼 여유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들꽃처럼 꾸밈없는 웃음/ 위로를 주는 말 한마디로 /그대 가슴은 깊은 샘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생수를 퍼주는 옹달샘/ 외로운 이들 아픈 사람들/ 이 세상은 모두 이런 사람들로 넘쳐나는 데/ 그대는 이미 너무 많이 아팠었기에/ 그들을 받아주고 안아주는 샘이어라/ 누구에겐가 찾아가고 싶을 때/ 마음속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을 때/ 등 기대고 싶은 사람/ 어느덧 당신은 이미 내게 쉼터가 되었네라~~” -샘물 중에서-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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