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과 중복, 그리고 이젠 말복까지 지나가면서 극성을 부리던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특히 복날이 되면 미루나무 아래 대청마루나 평상을 깔아놓고 온 가족은 물론 이웃 사람들이 모여 앉아 뜨거운 장국(칼국수)과 우물에 담아두었던 수박을 꺼내 나눠먹던 추억이 소록소록 피어오른다. 그 때는 참으로 이웃 간에 사랑과 나눔의 미학을 새겨보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되새기게 하는 그런 시간인 것 같다.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비교의식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내가 부러워하는 그 누구에게 물어 보라. 그는 또 다른 사람을 쳐다보며 그 사람처럼 되지못한 상태를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으로서는 당연하다. 비교의식은 소유욕의 산물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가를 놓고 행복의 가치를 정하려고 하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래서 물질의 소유에 따라 잘난 척, 으스대면서 살아간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를 얼마나 더 누리며 사느냐를 자랑하면서 남에게 과시하는 맛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풍족한 것과 행복은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행복의 기준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질 만큼 갖고 누릴 만큼 세도를 부리면서 살던 사람이 자살을 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열등감에 빠지며 더 소유하려다 죄를 짓는 일을 우리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사실 행복이라는 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1789)에서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나왔다. 이는 ‘신(神)은 죽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계몽주의가 근대사회를 지배하면서부터 신의 자리를 차지한 대표적 키워드가 됐다.

어느 때인가부터 많은 사람들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구별 짓기 위한 수단으로 명품가방, 돈, 학력 등의 보여지는 것만을 놓고 행복 추구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행복추구가 왜 사회문제화 되는 것일까. 이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는 것에 근본적 해악(害惡)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 된다. 다시 말해 사회적 구제를 요청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경향을 낳게 된다는데 있는 것이다.

결국 잘못된 행복의 포로가 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행복감을 측정하고 혹, 나는 불행한 것이 아닐까하며 고민을 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강요된 행복은 공허할 뿐이다. 이제 그런 강요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좋은 삶을 추구하자는 말을 하고 싶다. 행복하고 좋은 삶이 되려면 ‘마음을 쉬게 하고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행복은 소유의 비교가 아닌 존재의 확인에 있다.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인 ‘나(自我)’를 발견 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 인생의 무더위를 견디기 위해 내려놓을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날씨는 짜증 날 정도로 덥고 힘은 드는데, 우리는 짊어지지 않아도 될 것 까지 짊어지고 낑낑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빈자와 부자’ 의 차이는 있겠지만 힘들게 사는 건 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려놓지 못하고 쓸데없이 더운 여름 힘을 쓰는 데, 그 힘을 쓰는 내용을 보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지에 대한 염려와 불안에서부터 건강, 자녀문제, 노후계획,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타인에 대한 판단이나 분노 등등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소소하게는 우리의 키를 한 치나마 자라게 하지도 못하는 것들, 우리의 목숨을 일각이나마 늘리지도 못하는 것들, 이 모두를 우리는 힘겹게 짊어진 채 끙끙거리며 산다.

성경에도 보면 주님이 그 모두를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를 상하게 하고, 또 내 인생을 더 고달프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상당 부분은 결코 운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부과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짐들에 대해 힘겨워하는 우리는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새를 보라, 그리고 꽃을 보라” 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 하냐”고 반문까지 하셨다.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됨의 존재를 확인 하면 오늘 하루가 참으로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다.

학창 시절 성경을 읽다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거듭 행 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어 삶의 교훈으로 삼은 적이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생각했던 대로 생각하면 머리가 편하다. 편한데 익숙해지면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을 점차 덜게 된다.’

그 말대로 과연 ‘나’라는 ‘나’는 ‘사는 생각대로 살아 왔는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 했는가’ 자조(自嘲)섞인 말이겠지만 ‘삶의 교훈’도 또 ‘마음을 쉬게 내려놓는 것’ 까지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물질의 풍요함을 추구하는 속물로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연초부터 지금까지 온갖 메모로 빽빽해진 수첩을 보면 그저 남의 삶에 휘둘리며 60여년을 넘게 살았을 뿐 나 스스로의 생각대로 신선하게 지낸 날은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해마다 년 초면 ‘마음을 비운다.’ 는 목표를 세워보지만 언제나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기 일 수다. 오히려 나쁜 습관, 나쁜 생각은 반대로 버리지를 못한 것 같다.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바라고 원하는 것은 결국 다 부질 없고 허망할 뿐이다. 떠날 때는 부자(富者)도 빈자(貧者)도 모두를 남겨두고 떠나지 않는가.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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