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서로를 물고 뜯으며 살아야 하는가

공자에게 제자 자공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지식인(士)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행하는데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아가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가히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다.” “다음 가는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재목이 되기엔 부족하지만 친척들이 효성스럽다 말하면 그에 버금가는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은요?” “천박하고 고집스런 소인일지라도 말이 믿을 만하고 행동이 과감한 자는 다음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공이 이어 묻자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을 잇는다. “아, 도량이 협소하고 식견도 천박한 이들이니 말을 해서 뭣하겠는가.”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예로부터 정치인은 욕을 먹는 존재인가보다. 우리네 정치판을 보아도 도무지 타협이란 걸 좀처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의 도량이 좁은 건 맞는 말 같다. 하지만 식견이 꼭 천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최근 들어 정치인들이 앞다퉈 경쟁이라도 하듯 ‘그년’ ‘당신’ ‘귀태’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논쟁의 품격을 높이고 있으니 말이다.

쓸데없이 이런 문자를 쓴다고 지적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잘 몰라서 하는 말 같다.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들어보면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아주 그럴 듯하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이만한 단어만큼 효과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듣는 사람이 잘못 이해한다고 탓을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칼럼을 쓰면서 이처럼 서두에 정치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요즘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혈세가 빠져나가는 분한 마음을 풀길이 없다.

우리 영화나 개그 소재에서 ‘형님’ 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부작용으로 10대 청소년들이 ‘형님문화’에 깊이 빠져 들고 있다. 맹종(盲從)이 매력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맹종은 윤리적 판단 없이 그저 보스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형이하학적인 관계의 산물이다. 이 때 생각과 판단은 조직의 보스만 한다. 그리고 조직에 속한 사람은 어떤 명령이든 그저 행동하기만 하면 하면 학교 성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경제 상류층으로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명령을 따르는 방법에는 복종(服從)도 있다. 흔히 군대에서 효과를 높이고 조직의 질서를 잡기 위해 통용되는 방법이다. 군대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아야 하는 특수조직이다. 그래서 상관이나 고참이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개개인을 일정 규정에 적응시켜 집단 파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이라는 상황을 전제해야 하는 너무나 색다른 집단이기에 복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밖에도 굴종(屈從)이 있다. 일례로 오래 전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고 36년 동안 일제치하에서 이런 형태의 삶을 살아왔다. 나라를 잃으면 표면적인 굴종을 하는 상황이 온다. 이러한 맹종, 복종, 굴종은 그 의미들이 다소 다르기는 해도 모두 ‘따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경에는 순종(順從)이 있다. 순종은 말 그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가장 고상하고 수준 높게 따르는 방법이다.

성경은 가장 최고의 효과적인 삶이 바로 순종이라고 말 한다. 인간은 혼자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개인의 판단과 경험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경험을 따른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따라서 그런 축적된 경험을 소유한 스승이나 경험자의 말을 따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독자적 판단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것 역시 각 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문화를 따르는 생각에 기반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무조건 따르는 것만이 유익하고 효과적이라 할 순 없다. 필요에 따라서는 불복종(不服從) 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떤 군대도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지 않는 적은 없다 대한민국 군형법 44조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자’에게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라는 엄한 처벌 규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양심에 따른 명령 불복종으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겼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합천 해인사에 있는 국보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 그는 항명을 추궁하는 상부에 해인사의 가치를 조목조목 설명해 ‘귀하와 같은 장교를 둔 건 대한민국의 행운’ 이라는 찬사를 받은 분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태우는 건 잠시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며 구례 화엄사를 소각령으로부터 지킨 차일혁 총경, 오대산 상원사를 소각하려는 군장교에게 “그러려면 나부터 태우라”고 맞선 방한암 스님의 말을 듣고 법당 문짝만 불사르고 떠난 이름 모를 국군 장교.

거슬러 올라가 위화도 회군 이후 수많은 장군이 사리사욕에 의한 하극상으로 역사를 더럽히기도 했지만, 이렇듯 숭고한 불복종의 기록은 인간이 명령대로 단순 복종하는 기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지적하려고 했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던 같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모두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지식인을 자처하면서도 당론에 따라 무조건 맹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당 안에서의 행위도 그렇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도 그렇다는 얘기다.

분명 숭고한 불순종이 필요할 때도 많은 이들은 당장의 실리를 생각하며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부’를 할 줄을 모른다. 우리는 언제쯤 숭고한 불순종을 하는 지식인인 국회의원을 만날 수 있을까. 국민들 입에서 정당들을 향해 짜증을 부리며 “싸움질이나 하고 막말을 일삼는 너희들이 도대체 국민들 위해 해준 게 뭐냐”가 아니라 “그래 역시 너희들은 잘 났어”라는 소리를 듣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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